[OSEN=이상학 객원기자] 현대야구에서 불펜(Bullpen)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창고다. 경기 중반부터 감독과 코치들은 정신없이 불펜을 가동시키며 수시로 점검하기를 반복한다. 메이저리그와 달리 아직 국내에서는 문학구장을 제외한 나머지 6개 구장이 벤치 옆에 불펜을 두고 있지만 그 역할과 중요성은 다르지 않다. 불펜은 분업화된 현대야구에서 판도를 좌우하는 중대 요소이기도 하다. 올 시즌 프로야구도 그렇다. ▲ SK 질주의 힘 ‘불펜’ SK 김성근 감독은 예부터 이른바 ‘벌떼 마운드’로 명성을 드날렸다. 그동안 맡은 팀들이 대부분 전력이 약한 데 기인한 것이 바로 벌떼 마운드였다. 5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김 감독은 마운드가 어느 정도 안정된 SK에서도 변함없이 벌떼 마운드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벌떼 마운드는 SK가 단독선두를 질주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불펜 방어율 1위(2.63)를 달리며 팀 홀드도 1위(73개)에 올라있는 것이다. 8개 구단 중 가장 많은 경기당 3.79명의 불펜투수들을 투입시키고 평균 3.97이닝을 소화해내며 얻은 1위라 더욱 의미가 크다. 올 시즌 SK는 ‘제1선발’ 케니 레이번과 1경기 선발 등판이 전부인 신승현을 제외한 나머지 투수들이 모두 불펜에서 한 차례 이상씩 등판했다. 1군에서 1경기라도 출전한 투수 18명 중 무려 16명이 불펜에서 등판했다. 붙박이 선발투수가 없다는 것이 애로점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김 감독은 적재, 적소, 적시의 투수기용으로 불펜의 층을 넓히고 경기를 탄력적으로 운용했다. 물론 그 중에도 중심 투수들은 있다.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65경기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윤길현을 비롯해 가득염(61경기)·조웅천(60경기)·정대현(53경기)·김원형(41경기)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시즌 초반에만 하더라도 SK 불펜은 과부하가 우려됐다. 김성근 감독은 시즌 초반부터 이기는 경기에서는 불펜투수들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경기를 매조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연장경기와 1점차 승부가 많아진 탓에 불펜의 피로가 누적되며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한 차례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비온 뒤 땅이 더욱 굳어지는 것처럼 6월 중순부터 시작된 11연승 기간 동안 타선의 대폭발과 함께 불펜 전체가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벌떼 마운드로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선두팀답지 않게 선발진이 다소 취약한 SK로서는 불펜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불펜에 웃고 울고 SK 다음으로 가장 불펜을 잘 활용하는 팀은 역시 지키는 야구의 삼성이다. 올 시즌 삼성의 불펜 방어율은 SK에 이어 2위(2.84)이며 팀 홀드도 3위(46개)에 랭크돼 있다. 지난해 권오준이 홀로 불펜을 지킨 것이나 다름없었던 삼성은 올 시즌 권오준이 후유증으로 들쭉날쭉하지만 19홀드를 기록하고 있는 권혁을 필두로 안지만·윤성환·임창용·권오원 등이 불펜을 이끌었다. 최근에는 ‘쌍권총’ 권혁과 권오준이 나란히 2군에 가면서 군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정현욱과 ‘좌완 영건 트리오’ 조현근·차우찬·백정현이 시험대에 올랐다. 삼성의 불펜은 마치 재물이 자꾸 생겨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보물단지, 화수분과 같다. 물론 코칭스태프의 체계적인 발굴 및 관리시스템 그리고 선동렬 감독의 운용 능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 지붕 두 가족’ 두산과 LG도 불펜을 비교적 잘 활용하는 팀들이다. 두산의 경우에는 한화 다음으로 적은 경기당 2.97명의 구원투수를 투입하고 있으며 홀드도 30개로 8개 구단 중 5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임태훈이라는 특급 신인의 존재가 불펜의 알파와 오메가로 자리매김했다. 임태훈은 순수 셋업맨 중 가장 많은 89이닝을 소화하며 14홀드 방어율 2.22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리고 있다. 대조적으로 LG는 임태훈처럼 믿음직한 불펜요원은 없지만 경기당 3.40명(3위)의 구원투수를 투입하는 벌떼작전이 효과적으로 먹혀들고 있는 모습이다. 불펜 방어율은 6위(3.98)에 불과하지만 팀 홀드는 SK 다음으로 많은 51개다. 홀드 1위를 달리고 있는 왼손 원포인트 릴리프 유택현과 김민기·심수창이 불펜을 지켰다. 없는 자원을 짜낸 김재박 감독의 능력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화와 롯데는 불펜 활용도가 적었다. 이닝이터들이 선발진에 다수 포진한 한화는 불펜의 활용도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불펜 투구이닝이 2.86이닝으로 가장 적다. 구원투수들도 경기당 2.58명으로 역시 가장 적다. 하지만 안영명이 중심이 된 불펜의 방어율은 4위(3.33)다. 반면 롯데는 불펜 방어율 5위(3.54)에 팀 홀드도 22개로 최하위다. 홀드 요건이 성립되는 상황에서 등판했으나 이닝 중 주자를 남겨두고 강판되는 경우가 많았던 탓. 마무리 투수 호세 카브레라의 터프세이브(6개)와 블론세이브(4개)의 합이 10개나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LG 우규민도 카브레라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팀 홀드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만큼 롯데의 불펜운용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 2년 전처럼 나란히 2약으로 떨어진 7위 현대와 8위 KIA의 경우 마운드가 완벽하게 무너지면서 불펜을 언급할 당위성마저 사라졌다. 투수왕국이라는 옛 명성이 무색해진 현대는 불펜 방어율 최하위(4.58)다. KIA는 불펜이 8개 구단 중 가장 많은 경기당 4.03이닝을 던졌으나 선발투수들의 조기강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왔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불펜 방어율마저 7위(4.16)에 불과하다. SK 레이번과 윤길현이 마운드서 교대하는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