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딱’ 하는 파열음과 함께 쭉쭉 뻗어나간 타구는 그대로 대전구장 왼쪽 담장을 넘어갔다. 지난 7일 KIA와의 대전 홈경기에서 나온 한화 이범호(26)의 올 시즌 18호 홈런은 짜릿한 역전 결승 투런포였다. 이범호 개인으로는 지난달 5일 대전 현대전 이후 33일 만이자 18경기 만의 짜릿한 아치. 오랜만에 이름값을 한 이범호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짐을 떠안은 듯 근심이 한가득했던 얼굴에도 여유가 조금씩 감돌았다. 그러나 2007시즌이 이범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폭락한 타율 올 시즌 이범호의 타율은 2할4푼4리. 규정타석을 채운 42명 중 39위밖에 되지 않는다. 2004년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찍은 후 매년 타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다. 2004년 3할8리였던 타율은 2005년 2할7푼3리, 2006년 2할5푼7리 그리고 올 시즌 2할4푼대까지 폭락했다. 실질적인 풀타임 주전멤버로 자리매김한 2002년 타율(0.260)보다도 못한 것이 올 시즌 이범호의 현실이다. 3년 연속으로 타율이 하락했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가치를 깎아먹기에 딱 좋다. 그래도 시즌 초반에는 예년에 비해 볼넷 수치가 크게 증가해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기대대로 6월에는 타율 3할2푼9리·8홈런·17타점을 몰아치며 화려하게 부활한 듯했다. 그러나 7월 타율 2할7푼5리·2홈런·8타점으로 다시 하락세를 타더니 8월에는 타율 2할9리·1홈런·5타점이라는 극악의 성적을 남겼다. 한화의 가공할 만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후반기를 기점으로 물에 젖은 불발탄이 되어버린 것도 5번 타순에서 블랙홀로 전락한 이범호의 부진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범호는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슬러거 중 하나다. 2002년부터 6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고 있으며 2004년부터는 3년 연속으로 20홈런을 때려내고 있다. 올 시즌에는 3루수 최초의 4년 연속 20홈런이라는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장타를 의식적으로 노리는 타자는 타율에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범호는 2004년 타율 3할8리를 치면서도 23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 더 높은 수준의 이범호를 바라는 팬들 입장에서 매년 폭락하고 있는 이범호의 타율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위압감을 느끼다 이범호 역시 고민의 기색이 역력하다. 스스로 ‘위압감’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할 정도. “타율이 낮으니까 머릿속에서 짧게 쳐야 한다는 위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이범호의 말이다. 위압감이라는 말보다는 압박감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위압감이든 압박감이든 이범호의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부담의 무게가 상당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힘껏 노려 치는 타격으로 상대 투수들에게 위압감을 선사한 이범호가 스스로 위압감에 짓눌리고 있는 것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경우가 아닐 수 없다. 한화 김인식 감독은 요즘 이범호에게 “공을 보고 치라”고 주문하고 있다. 타자가 공을 보고 치는 것은 농구선수가 림을 바라보고 슛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기본적인 사항. 하지만 슬럼프에 빠지거나 기술적인 문제가 생긴 선수들은 기본적인 것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경우가 없지 않다. 특히 동작 하나하나가 민감하게 작용하는 야구에서 타자들의 미세한 변화는 감지하기 어렵지만 성적을 망치는 원흉이 되기도 한다. 올 시즌 이범호가 딱 그렇다. 별다른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이상하리 만큼 공이 방망이에 맞지 않았다. 이같은 부진으로 이범호는 올 시즌 보이지 않는 고초를 많이 겪어야 했다. 지난 2003년 8월3일 대전 SK전부터 시작된 현역 최다 연속 경기 출장(541경기)의 주인공답지 않게 부진을 이유로 선발 라인업에서 2차례나 제외됐으며 6월 초에는 김인식 감독으로부터 경고성 트레이드 메시지까지 받았다. 6월 한때 반짝 활약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이범호의 스윙은 짧아졌지만, 힘이 떨어진 건 물론 정확성도 크게 나아지지 않아 상대에게 별다른 위압감을 주지 못했다. 코칭스태프와 팬들은 살아날 것이라 믿기를 수 차례 반복했지만 침묵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바닥을 치다 이범호에게 7일 KIA전 역전 결승 투런포가 뜻 깊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역전 결승 홈런이라는 상징성도 상징성이지만 “기가 막힌 스윙”이라는 김인식 감독의 말대로 오랜만에 이범호다운 타격을 했다는 점이 더욱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상대의 실투를 놓치지 않는 킬러 본능도 뛰어났거니와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하게 한 파열음은 스탠드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순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비거리는 125m로 올 시즌 이범호의 최장거리 홈런이었다. 사실 홈런을 터뜨리기 직전까지도 이범호는 스스로 위압감에 눌리고 있는 터였다. 김인식 감독도 처음에는 이범호에게 강공이 아닌 번트를 지시한 상태였다. 하지만 KIA 배터리가 번트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로 초구부터 위협구를 던지자 김 감독은 2구째에 바로 강공으로 작전을 바꿨고 이범호는 그에 홈런으로 화답했다. “최소한 진루타를 치겠다는 생각이었다. 타구를 굴리지 않고 병살타가 나오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썼다”는 이범호였지만 결과는 꽃보다 아름다운 홈런이었으며 스스로 짓눌렸던 위압감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이었다. 바닥을 치기 위해 이범호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우천 리그' 인 탓에 경기가 띄엄띄엄 열리고 있는 요즘에는 우경하 타격코치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부진 탈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이범호는 “그 전에는 타격코치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는데 요즘은 워낙 안 좋아서 이런저런 자문을 구하며 심리적 안정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4년 연속 20홈런에 대해서도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팀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우선이다. 팀이 이기다보면 나나 (김)태균이나 (개인성적도) 좋아질 것이다”며 팀 성적을 우선 강조했다. 하지만 바닥을 치고 스스로 위압감에서 해방된 이범호는 다시금 상대 투수들에게 위압감을 선사할 것이다. ‘위압감’이라는 단어는 스스로를 짓누르는 것보다는 상대를 짓누를 때나 어울리며 그것이 이범호라면 더욱 더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