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지난 4년의 시간은 세련된 스트라이프 유니폼의 LG에 어울리지 않는 나날이었다.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값진 결실은 거대한 신기루가 되어 사라졌고 프랜차이즈 스타들도 하나둘씩 은퇴하거나 팀을 떠났다. 1990년대의 화려한 영광은 오래된 환영처럼 느껴질 정도로 2000년대 LG는 허점투성이에다 나약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룹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LG는 아픔의 침묵을 깨고 다시 잠실구장의 푸르른 잔디에서 신바람을 내고 있다.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많이 낮아졌지만 누구도 LG에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는다. ▲ 5할 승률에 육박 5할 승률은 승리의 시즌을 의미한다. 패배보다 승리가 많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목표다. 그러나 지난 4년간 LG에 5할 승률은 부수기 어려운 견고한 벽이었다. 2003년(0.458)·2004년(0.457)·2005년(0.432)·2006년(0.385) 등 해를 거듭할수록 승률이 떨어졌다. 최종 성적도 6-6-6-8위였다. 특히 지난해에는 창단 후 처음으로 최하위라는 수모까지 당하며 6월부터 시즌을 접었다. 하지만 올 시즌 LG의 승률은 4할9푼5리. 거의 5할에 육박한다.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를 떠나 5할에 육박한 승률은 승리의 시즌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올 시즌 LG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치명적인 긴 연패가 없었다는 점이다. 6개월 여 장기레이스를 치르다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오르내림을 얼마나 잘 보내느냐에 따라 각 구단들의 한 시즌 성패가 엇갈리기도 한다. 올 시즌 LG는 8개 구단 중 가장 늦게 5연패를 당한 팀이다. 5연패 이전에 7차례의 4연패가 있었지만 고비 때마다 연패 사슬을 끊는 데 성공하며 상승 기류를 타는 계기로 만들었다. 7차례 4연패 이후 7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중 4번은 에이스 박명환이 선발 등판해 팀의 연패를 끊었으며 나머지 2번은 극적인 1점차 역전승이다. 팀을 연패에서 구제해낼 에이스의 존재 그리고 위기에서 더욱 집중력을 발휘하는 타선의 응집력과 뒷심은 올 시즌뿐만 아니라 내년 이후 LG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위기를 헤쳐 나가고 이기는 방법을 터득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 패배주의의 완전 타파 패배주의는 무서운 병이다. 패배만큼 무서운 중독은 없다. 1990년대 승리라는 즐거운 중독에 빠졌던 LG는 2000년대 이후 패배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장기레이스에서 패배는 병가지상사다. 그간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LG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병가지상사도 한 번 실수 때나 족한 것이다. 중고참의 부재로 베테랑은 베테랑대로, 젊은 피들은 젊은 피대로 분열되면서 팀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고 패배주의라는 무서운 돌림병이 퍼졌다. 열이 하나로 뭉치기보다 하나가 열로 분열된 탓에 패배주의를 타파할 힘이 부족했다. 하지만 김재박 감독의 선임과 함께 대대적으로 쇄신된 팀 분위기는 LG를 180도로 바꿨다. 현대에서 무려 4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룩한 ‘승리 전문가’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동기와 열정 그리고 투지를 부여하며 잠재된 가능성을 끌어내는 데 주력했다. 최하위 다음 시즌인 만큼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리빌딩의 시점이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김 감독은 베테랑들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주며 새로운 경쟁체제와 팀 체질개선을 도모했다. 최동수·이종렬 등 30대 중후반 베테랑들이 맹활약하고 있는 것은 젊은 선수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 시즌 LG는 역전승이 무려 27승이나 된다.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눈앞에 둔 1위 SK(29승) 다음으로 많은 역전승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 차례 역전을 허용한 후 다시 경기를 뒤집은 재역전승이다. LG의 재역전승은 12승으로 8개 구단 중 가장 많다. 한 번 역전을 허용하면 힘없이 무너진 지난 4년과 달리 역전을 당해도 또 다시 경기를 뒤집는 힘이 생겼다. 패배주의가 타파되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스타들의 '농군 패션 하모니' 과거 LG는 세련된 스타들의 팀이었다. 1994년 데뷔한 유지현·김재현·서용빈은 실력과 상품성을 두루 갖춘 스타들이었다. 팀 컬러도 호쾌한 신바람 야구였던 만큼 전국적인 인기몰이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가 던진 파장도 컸다. 5인 선발 로테이션의 도입도 컸지만 선수 개개인의 특성을 살리는데 주력한 자율야구는 탁상공론이라는 잇따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실패가 아닌 성공에도 후유증은 있었다. 자율야구가 팀의 전통이 됐지만 핵심선수들이 하나둘씩 전열에서 이탈하며 팀 전력이 약화됐고, 자율야구는 졸지에 방임야구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턴가 LG에는 ‘선수들이 겉멋만 들었다’는 지적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올 시즌의 LG는 다시 한 번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1990년대처럼 세련되지는 않았다. '농군 패션 하모니' 라는 것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선수들의 면면도 많이 바뀌었지만 중요한 것은 자율과 관리의 선을 넘나드는 김재박 감독의 지휘 아래 팀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유니폼 바지 밑단을 뜯어 스파이크를 덮는 패션은 스타킹을 무릎 근처까지 올리는 농군 패션으로 달라졌고 선수들도 표정과 눈빛에서부터 의욕과 투지를 보이고 있다. 팬들이 바라던 바로 그 모습들이다. 물론 겨우내 공격적인 투자를 한 것을 감안하면 지금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할지도 모른다. 박명환의 영입은 성공작이었지만 봉중근은 아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모든 투자가 성공을 대변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단계적인 상승은 급진적인 상승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최하위에서 지난해 4위로 도약했던 KIA는 올해 다시 최하위로 추락했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 혜안이 필요한 것이 바로 지금의 LG다. 올 시즌을 놓고 볼 때 LG에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