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괴물’ 류현진(한화·20)에게 2006년은 달콤 짭짤하며 황홀한 해로 기억된다. 그러나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대한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생애 첫 포스트시즌에서 5경기에 선발등판했으나 승없이 2패 방어율 4.30이라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류현진의 이름값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류현진은 “(포스트시즌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번의 패배는 병가지상사. 류현진은 지난해 가을의 실패를 거울삼아 올 가을에는 승리를 다짐하고 있다. ▲ 강약 조절에 눈 떴다 류현진은 힘에만 의존하는 파워 피처가 아니다. 물론 류현진의 직구는 타자들이 가장 상대하기 싫은 막강 구질이다. 그러나 한 경기를 책임져야 하는 에이스가 경기 내내 전력으로 투구할 수는 없다. 초반부터 1구, 1구 전력으로 투구할 경우에는 경기 중반부터 스태미나에서 문제점을 드러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힘을 넣고 빼는 강약 조절을 효과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류현진처럼 빠르고 묵직한 공을 지닌 투수라면 구속의 가감을 통해 타자를 더욱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지난해 류현진은 투구 이닝(201⅔)이 워낙 많았지만 직구에 의존한 파워 피칭이 결과적으로 시즌 막판 구위 하락과 집중력 부족을 야기하고 말았다. 지난해 11개 피홈런 중 5개가 8월 이후 맞은 것이었다. 시즌 중 구대성으로부터 전수받은 체인지업이라는 무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직구에 더욱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강약 조절에 실패하며 포스트시즌에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큰 것을 맞으며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올 시즌은 피칭 스타일이 크게 달라졌다. 체인지업의 비율이 눈에 띄게 늘어나 오히려 직구의 위력을 스스로 감소시킨다는 지적까지 있을 정도. 류현진은 "작년에는 계속 세게 던지고 윽박지르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올해는 타자에 따라 페이스를 조절하며 (범타로) 맞혀 잡는 데 신경을 쓰다 보니 체력적으로 편해졌다”고 말한다. 특히 “볼로 유인구를 던지기보다는 스트라이크를 던져 치게 하는 것이 가장 달라진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올 시즌에도 류현진은 탈삼진 부문에서 독보적인 1위(168개)를 달리고 있지만, 마운드에서 강약 조절에 눈을 뜬 것은 화석처럼 굳건한 사실이 됐다. 가장 최근의 2경기가 그 예다. 지난 7일 대전 KIA전에서 류현진은 7이닝 6피안타 1볼넷 2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14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경기 후 김인식 감독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7이닝 5피안타 3볼넷으로 15승을 수확한 12일 대전 LG전에서 김 감독은 “타자를 압도하는 피칭”이라고 총평했다. 컨디션이 좋아도, 좋지 않아도 결과가 엇비슷하다는 것은 그만큼 강약 조절을 앞세운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 올해는 신인이 아닌 에이스 지난해 류현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로또였다. 하지만 올해는 시작부터 에이스라는 짐을 안고 시즌을 임했다. 김인식 감독도 당근보다는 채찍으로 류현진을 강하게 조련했다. 4월 6일 SK와 개막전에서 이재원에게 올 시즌 프로야구 1호 홈런의 희생양이 되는 등 5⅔이닝 동안 4실점으로 부진할 때만 하더라도 2년차 징크스의 악령이 덮칠 것만 같았지만 류현진은 악령의 경보음을 다음 등판에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차임벨로 바뀌었다. 이제는 류현진 스스로가 “그때는 나에게도 이런 것이 오는구나 싶었다”며 당시의 철렁함을 웃는 낯으로 말하지만 여유를 찾는 시간이 늦었다면 한화로서는 생각하기 싫은 아찔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류현진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하는 팀의 에이스로서 자각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 시즌 류현진은 5회 이전 조기 강판이 단 한 차례도 없다. 올 시즌 최고의 투수인 다니엘 리오스(두산)조차도 딱 한 번 5회 이전에 조기 강판한 적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두드러지는 대목. 어떻게든 선발투수가 최소한으로 해야 할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리오스와 함께 가장 많은 완투경기(6회)는 완투형 투수가 소멸된 요즈음에 희소가치가 매우 크다. 게다가 앞으로 4이닝만 더 추가하면 사상 첫 데뷔 2년 연속 200이닝 돌파라는 기록까지 세우게 된다. 12일 LG전 승리로 류현진은 고졸선수 최초의 데뷔 2년 연속 15승 달성이라는 값진 기록까지 달성했다. 대졸선수를 포함하면 김시진-이강철에 이어 프로야구 역대 3번째. 용병이나 다름 없던 재일동포까지 범위를 넓히면 김일융까지 포함해 역대 4번째다. 막 고교를 졸업한 후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2년 연속으로 에이스를 상징하는 15승을, 그것도 모두 2점대 방어율과 함께 이뤘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 학력과 학벌에서 자유로운 프로야구판에서 요즘의 고졸선수는 대졸선수보다 더 후한 대접을 받고 높은 기대를 받기 마련이지만 이 정도 활약을 보이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천지개벽 같은 일이라 할 만하다. 남은 시즌 류현진은 3~4경기 선발 등판이 유력하다. 2위 진입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한화는 류현진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남은 기간 류현진의 목표는 200이닝 돌파와 18승이다. 2년 연속으로 200이닝을 돌파하고 지난해 18승에 다시 한 번 도달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숫자가 아니다. 12일 LG전 승리 후 류현진은 수줍지만 다부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가는 경기마다 이길 수 있도록 하겠다”. 그렇다. 진정한 에이스는 숫자가 아닌 존재감으로 상대의 기를 죽이고 팀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나가는 경기마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바로 에이스다. 이제 약관의 고졸 2년차 괴물투수는 그렇게 벌써 에이스가 되어 가을을 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