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현대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타순은 몇 번일까. 십시일반의 원칙이 적용되는 야구경기에서 어느 한 타순을 꼭 짚기란 그렇지만 득점 생산의 주된 타순은 아무래도 중심타선이 될 수 밖에 없다. 3~5번 타자 모두 중요하지만 1회에도 타순이 들어오는 3번 타자나 상대팀에게 압박감을 심어줄 수 있는 4번 타자의 역할은 지대하다. 특히 일본 프로야구는 4번 타자를 우대하는 문화가 깃들어 있다. 그 중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는 곧 일본 프로야구의 프라이드다. ‘국민타자’ 이승엽(31)은 요미우리의 제70대 4번 타자다. ▲ 4번 타자의 숙명 3번 타자는 정확성과 파워 그리고 클러치 능력을 두루 갖춰야 한다. 한 타순이라도 더 빠른 3번 타자는 4번 타자보다 어떤 면에서 해야 할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고전적인 4번 타자의 중요성은 두 말 하면 입이 아프다. 뼈대가 약한 팀은 미풍에도 흔들리기 십상이다. 4번 타자는 한 팀의 뼈대이자 기둥이다. 4번 타자는 설령 성적에서 손해를 볼지라도 그 상징성으로 보이지 않는 공헌도가 크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4번 타자를 맡는 선수들이 고충을 겪는 것은 그만큼 4번이라는 자리가 주는 심리적 압박감은 물론 스스로 드러나지 않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4번 타자는 참을성이 좋아야 알고 결정적일 때 한 방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타선이 약한 팀의 4번 타자는 상대의 집중견제라는 덫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올 시즌 롯데 이대호가 더욱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각 팀마다 중심타자들의 무게감이나 존재감이 다르지만 4번 타자는 3·5번 타자보다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상대 팀은 공 하나하나에 온 힘을 쏟으며 4번 타자를 견제한다. 타격 감각이 좋더라도 심리적으로 쫓기거나 흔들리게 되면 밸런스가 흐트러지게 된다. 4번 타자들의 슬럼프가 잦고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4번 타자 이승엽 이승엽은 삼성 시절 주로 3번 타자를 쳤다. 그 뒤에는 양준혁·김기태·마해영 등 내로라 하는 국내산 거포들에다 찰스 스미스·훌리오 프랑코 등 외국인 타자들이 뒷받침했다. 이승엽의 통산 고의4구 숫자가 57개로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지난해 요미우리 이적 후 이승엽은 본격적으로 4번 타순에 기용됐다. 풀타임 4번 타자로 활약한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이렇다 할 동료 타자들의 지원 없이도 타율 3할2푼3리·41홈런·108타점이라는 가공할 만한 성적을 남겼다. 외국인 선수라는 이유로 4번 타자 그 이상의 견제를 받았지만 훌륭하게 이겨냈다. 그러나 4번 타자 2년차를 맞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올 시즌 125경기에서 타율 2할7푼4리·27홈런·64타점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4번 타자로 기용되지 않았을 때 성적은 다르다. 올 시즌 이승엽은 6번 타자로 26경기, 5번 타자로 17경기, 7번 타자로 10경기에 출전했다. 5~7번으로 기용된 53경기에서 이승엽은 타율 3할2푼4리·14홈런·29타점으로 좋은 성적을 냈다. 그러나 4번으로 기용된 72경기에서는 타율 2할3푼8리·13홈런·35타점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왼쪽 무릎 부상 후유증부터 어깨·엄지손가락까지 각종 부상 악령에 시달린 것도 한 요인이지만 4번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결론을 도출할 근거가 충분히 된다. ▲ 그래도 4번 이승엽 지난 7일 한신과의 홈경기에서 일본 프로야구 진출 후 처음으로 한 경기 3홈런을 날리는 등 2경기에서 4홈런을 터뜨리며 부활을 알린 이승엽은 9일부터 4번으로 복귀했다. 이승엽을 대신해 차례로 4번을 맡은 아베 신노스케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도 부진을 면치 못하던 시점이었다.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이승엽이 4번에 배치되어야 팀 타선이 산다고 판단, 중요한 순위싸움에서 이승엽을 다시 4번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이승엽은 4번 복귀 후 6경기에서 26타수 5안타, 타율 1할9푼2리·1타점으로 부진하다. 다행히 15일 히로시마전에서 멀티히트를 기록하며 살아날 기미를 보인 것이 위안거리다. 요미우리는 살얼음 순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시즌 내내 센트럴리그 1위를 질주했으나 후반기부터 마운드의 붕괴와 함께 한신·주니치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15일 현재 센트럴리그 2위(72승1무59패)를 마크하며 1위 한신(69승5무55패)을 반 게임 차로 쫓고 있으나 3위 주니치(67승2무57패)에도 반 게임 차로 추격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요미우리로서는 팀 타율(0.276)·홈런(174개) 1위에서 나타나듯 방망이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게 방망이지만 그 방망이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야구다. 요미우리의 1위 탈환을 위해서도 4번 타자 이승엽이 해야 할 일은 많다. 하루빨리 4번 타자의 딜레마를 벗어 던져야 하는 이승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