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TV에서 새로 시작한 주말드라마 ‘조강지처 클럽’(문영남 극본, 손정현 연출). 이상하게 KBS 연속극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애정의 조건’ ‘장밋빛 인생’ ‘소문난 칠공주’ 등 KBS 드라마를 통해 탄탄히 뿌리를 내린 문영남 작가가 극본을 집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KBS 연속극의 성공 공식’에 착착 들어맞는다.
여기서 ‘KBS 연속극’은 미니시리즈를 제외한 일일, 주말 드라마를 지칭한다. 작가가 바뀌고 연출자가 바뀌고, 배우들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시청률 30%대의 놀라운 경쟁력을 유지하고 KBS 장편 연속극을 말한다. 마치 정해진 공식에 따르듯 먼저 퍼즐 조각을 완성(캐릭터 설정)한 뒤 나머지(스토리)는 그냥 만들어진 조각들이 제 자리를 찾아 가도록만 하면 되는 그런 드라마 말이다.
저절로 살아 움직여라, 스토리 보다는 캐릭터
문영남 작가의 최근작에서 드러난 개성이기도 하지만 드라마에서 스토리보다 캐릭터를 먼저 세우는 작업은 아주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선 배역 이름에서부터 그 캐릭터의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주인공인 한복수(김혜선 분)와 나화신(오현경 분)은 둘이 합쳐 ‘복수의 화신’이 된다. 비슷하게 남자로부터 배신 당하고 속이 시원하게 복수극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이 미리부터 나와 있다.
그녀들의 복수의 대상이 되는 이기적(오대규 분)과 한원수(안내상 분)도 마찬가지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해서 ‘기적’이지만 성 씨까지 붙여서 읽으면 아주 이기적인 남자가 오대규이고 안내상의 한원수는 아예 ‘원수 같은 인간’이다. 남편이 버젓이 첩살이를 하는데도 한 평생 혼자서 모든 짐을 지고 사는 ‘안양순(김해숙 분)’, 훤칠한 인물 하나만 믿고 평생을 한량으로 지내온 ‘한심한(한진희 분)’, 남자의 바람기를 부추겨 20년을 첩으로 살고 있는 ‘복분자(이미영 분)’…. 기러기 아빠 손현주는 아예 이름이 ‘길억’이고 한원수와 바람 피우는 여자는 ‘모지란(김희정 분)’이다.
배우들이 각자 주어진 이름에 어울리는 캐릭터를 세울 줄만 알면 이 드라마는 절반 이상은 완성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머지는 캐릭터들을 연결시키는 에피소드만 뒤따르면 된다. 이것은 물론 작가의 몫이다. 이런 식이라면 드라마 제작 관계자들이 ‘최소 80부’라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100회 아니, 200회도 가능하다. 드라마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각자의 삶만 열심히 살아가면 그게 바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건 싫다, 비유 상징보다는 직설
그렇다 보니 드라마에서 숨기고 가릴 게 하나도 없다. 이미 이름에서 캐릭터의 90% 이상을 밝혔는데 더 이상 숨길 게 뭐가 있겠는가. 시청자들은 철저하게 전지자의 관점에서 극을 바라본다. 극중 인물끼리만 서로 모를 뿐 시청자들은 누가 바람을 피우는지, 누가 무엇 때문에 속을 썩고 있는 지 다 안다.
소재도 지극히 단순하다. 남편의 바람과 여자의 대응, 그리고 사회적 문제를 슬쩍 건드려 조기 유학의 부작용을 집어 넣었다. 남편(또는 아내)의 바람과 자녀 교육, 안방극장을 주름잡고 있는 우리네 주부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다거리다. 옆집에 누구 아빠가 누구랑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와 우리 아이 학교 친구 누구누구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얘기만큼 주부들의 관심을 끄는 소재는 없다. 그 주부들이 떠들고 흉보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대화에 상징과 비유는 필요 없다. 그냥 있는 대로 강하게 전달하면 된다.
웃을 사람 웃고 울 사람 울어라, 웃음과 눈물의 자극적 교차
웃는 캐릭터와 우는 캐릭터도 철저하게 구분 돼 있다. 이기적과 한복수, 한원수와 나화신이 그려낼 이야기는 눈물과 분노다. 복수와 화신은 울다가 울다가 벌떡 일어나 바람둥이 남편에게 한 주먹을 세게 날리면 된다. 시청자들도 같이 울다가 속이 후련해진다.
‘기러기 아빠’ 길억은 남정네들의 눈물까지 책임졌다. 부도난 회사에 건강까지 헤쳐가면서 유학간 아들과 아내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었는데 돌아오는 건 아들과 아내의 차가운 시선뿐이다. 주부 시청자는 물론 한 가정을 책임지고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 남편들의 콧잔등까지 시큰하게 해 줄 인물이 길억이다.
반면 한심한(한진희 분)과 이화상(박인환 분)은 웃음 코드를 책임졌다. 아예 염소수염까지 붙이고 나온 한심한은 본처와 첩 사이를 오가며 완전히 딴 세상을 살고 있다. 잠시도 춤 스텝을 멈추지 않는 한심한 노릇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한복수(김혜선 분)의 시아버지인 이화상도 철없는 손녀들을 상대로 “뻥이야”를 주고 받으며 놀 정도로 4차원의 세계에 빠져 있다.
울 사람은 울고, 웃을 사람은 실컷 웃어라. 우리 드라마는 모든 것을 다 갖췄느니라.
논란도 관심이다, 논란 마케팅
설정들이 매우 극단적이고 화법들은 직설적이다 보니 당연히 구설수가 뒤따른다.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한 집안 식구가 모조리 바람둥이인 설정부터가 논란 덩어리이다. 대한민국이 불륜 공화국이라면 그 대표적인 가정이 바로 ‘조강지처 클럽’에 나오는 한 씨 집안이다.
설정들도 한껏 논란을 몰고 오기에 충분하다. 내주에 방송될 예고분량이기는 하지만 어머니 안양순(김해숙 분)은 결별 위기에 처한 아들 부부 한원수(안내상 분)-나화신(오현경 분)을 앉혀놓고 농약병을 들이킨다. 물론 농약병에 든 물질이 극약은 아닐 테지만 설정만 보노라면 끔찍하다. 그런데 이런 논란거리들이 아무 이유 없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논란이 생겨야 관심도 뒤따른다는 논리가 배경에 있다.
‘조강지처 클럽’에서의 ‘KBS 냄새’는 어쩌면 문영남 작가의 개인적 취향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 없는 정황도 있다. 많은 작가들이 방송사를 옮겨 다니면서 작업을 하지만 방송사의 색깔까지 옮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KBS의 시청률 30%짜리 연속극을 만들어 내는 노하우는 은근히 다른 방송사에서도 탐내고 있었다. ‘조강지처 클럽’에서 풍기는 KBS 분위기는 그래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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