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미미했지만 무난한 첫 해였다.
‘한국산 안타 제조기’ 이병규(33·주니치)가 일본 프로야구에서 첫 시즌을 마감했다. 이병규는 올 시즌 132경기에서 478타수 125안타로 타율 2할6푼2리에 9홈런·46타점·36득점을 마크했다. 타율이 규정타석을 채운 34명 중 전체 29위이며 최다안타·홈런·타점에서 각각 24·28·27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아직 센트럴리그 일정이 요코하마와 야쿠르트의 2경기를 남겨두고 있지만 개인 성적 순위는 거의 확정적이다.
이병규의 일본 프로야구 데뷔 첫 시즌을 되돌아본다.
▲ 고정되지 않은 주전
이병규는 주니치 오차아이 히로미쓰 감독이 직접 영입을 결정한 선수다. 지난 3년간 주전으로 활약한 외국인선수 알렉스 오초아가 해를 거듭할수록 공수 양면에서 하락세를 보이자 과감히 퇴출을 결정하고 지난 겨울 이병규를 영입했다. 주니치는 이병규를 익히 알고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의 ‘자매구단’ LG에서 간판으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누빈 이병규를 예부터 주목해왔던 것이다. 오치아이 감독도 이병규에 호감을 갖고 있었고 이병규의 주니치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자신이 한 번 믿음을 준 선수는 끝까지 밀어주는 스타일인 오치아이 감독은 중심타자 후쿠도메 고스케의 팔꿈치 부상에 따른 시즌-아웃까지 겹치자 이병규를 확실한 주전으로 기용했다. 하지만 지난 6월 6일 수비 불성실을 이유로 2군에 떨어진 이병규는 17일간 2군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 기간 동안 11경기에 결장했다. 1군 복귀 후에도 한 차례 결장했지만 이병규는 올 시즌 132경기 중 120경기에 주전으로 선발 출장했다. 나머지 12경기는 대수비 5게임, 대타 4게임, 대주자 3게임이었다. 그래도 첫 해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 중 가장 많은 경기 출장과 안타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오치아이 감독이 어떻게든 이병규를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다양한 타순 배치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병규는 ‘부동의 4번’ 타이론 우즈가 버티고 있는 4번 타순과 투수가 들어가는 9번 타순을 제외한 나머지 7개 타순에 모두 기용됐다. 한 마디로 고정된 타순이 없었다. 5번 타자로 시즌을 출발한 이병규였지만 5번 타순에서는 21경기 출장에 그쳤다. 대신 6번 타자로 가장 많은 39경기에 출장했고 7번 타자로 35경기에 출장했다. 그 다음으로 1번(11경기)·3번(6경기)·2번(5경기)·8번(3경기)이 뒤를 이었다. 중심타자로는 장타력과 파괴력이 떨어졌고 테이블세터로는 출루율이 문제였다. 결국 시즌 막판 들어 이병규는 6번으로 타순이 거의 고정됐다.
▲ 모호한 타자 정체성
주니치가 이병규를 데려올 때 기대한 모습은 역시 중장거리 타자였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이병규가 가장 능력을 발휘했던 타순은 중심타자, 그것도 3번이었다. 게다가 주니치에는 이미 이바타 히로카즈-아라키 마사히로로 이어지는 수준급 키스톤콤비 겸 테이블세터가 있었다. 여기에 3번 타순에는 후쿠도메라는 간판타자가 있었고, 4번 타순에는 우즈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치아이 감독이 이병규를 데려온 건 개막전에서 5번 타자로 기용한 것처럼 중장거리 타자의 활약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장거리 타자로 이병규는 기대치를 밑돌았다. 홈런이 9개였고 장타율은 겨우 3할7푼이었다. 이병규가 국내에서 10년간 활약하며 기록한 통산 장타율은 4할6푼7리였으며 장타율이 3할대로 떨어진 시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 진출 첫 해부터 장타력이 크게 떨어졌다. 타점도 46개로 적은 편이었다. 득점 찬스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득점권 타율은 정확히 2할5푼이었고 타점은 36개였다. 물론 타율이나 타점에 비해 결승타는 4개로 비교적 많았다. 결승타뿐만 아니라 지난 9월4일 요미우리전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은 만루포를 터뜨린 것처럼 간혹 결정적일 때 맹활약한 것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병규의 첫 시즌은 타자로서 모호한 정체성을 남겼다. 주니치가 기대했던 중장거리 타자로는 홈런이나 장타력에서 부족한 모습이었다. 간간이 보여주는 결정력 정도로 중심타순을 꿰차기에는 벅찼다. 그렇다고 정확한 타격과 출루에 기반을 두는 교타자도 아니었다. 출루율이 2할9푼5리로 3할이 되지 않았다. 국내에서와 달리 안타 생산력은 크게 떨어졌지만 국내에서처럼 볼을 고르는 데는 별다른 흥미를 두지 못했다. 올 시즌 볼넷이 겨우 23개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삼진이 108개로 슬러거 수준이었다. 센트럴리그에서 100삼진 이상 당한 11명의 타자 중 홈런이 두 자릿수가 되지 않는 타자는 앤디 시츠(한신)와 이병규가 유이했다.
▲ 환경과 적응의 첫 시즌
이병규의 올 시즌은 성적만을 놓고 보면 외국인선수라는 것을 감안할 때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만큼 외국인선수에게 슈퍼맨급 활약을 요구하지 않는 일본 프로야구라는 것을 고려해도 그렇다. 하지만 야구는 환경과 적응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스포츠다. 특히 야수는 환경은 둘째 치더라도 적응의 시간이 더욱 필요한 위치다. 생경한 경기장과 생경한 투수들을 상대로 첫 해부터는 잘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날고 긴 이종범, 이승엽도 일본 진출 첫 해에는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괜히 한국인 선수 첫 해 징크스가 생긴 것이 아니다.
물론 주니치 유니폼을 입고 1998년 일본에 데뷔한 이종범에게는 팔꿈치 부상이라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성적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종범의 1998년 첫 해 성적은 67경기 출장, 타율 2할8푼3리·10홈런·29타점·38득점·18도루·36볼넷·33삼진에 출루율 3할8푼7리였다. 그러나 당시 이종범은 팔팔한 28살로 신체나이나 기량이 최절정이었다. 이종범의 나이와 이름값을 고려하면 오히려 성에 차지 않는 성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병규는 냉정하게 전성기가 지난 상태에서 일본무대에 뛰어들었지만 무난한 첫 해 성적을 냈다. 게다가 환경과 적응의 시간도 충분히 거쳤고, 오치아이 감독도 구단으로부터 재신임을 받았다. 주니치와의 계약기간 마지막 해가 되는 내년 시즌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 물론 13일부터 시작되는 한신과의 센트럴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스테이지에서부터 그 기대가 현실화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