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SK, '몸에 맞는 볼에 웃고 울다'
OSEN 기자
발행 2007.10.25 09: 19

[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 23일 문학구장. 한국시리즈 2차전을 앞둔 SK 덕아웃의 분위기는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4번 타자 이호준은 두문불출한 전날과 달리 특유의 입담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4번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이호준은 중저음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두산은 볼도 맞으면서 나갔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1차전에서는 투지에서 밀렸다는 표현이었다. 이어 이호준은 “오늘(2차전)은 다를 것”이라고 했다. 1차전에서 4타수 무안타로 침묵한 이호준은 2차전에서 선제 투런 홈런 포함 4타수 2안타 2타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SK는 또다시 두산에 졌다. 두산은 2차전에서 1차전과 마찬가지로 몸에 맞는 볼 3개를 얻었다.
▲ 사구(死球)의 미학
몸에 맞는 볼은 타자에게 불운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몸에 맞는 볼로 불의의 부상으로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선수생활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각한 외상만이 전부가 아니다. 몸에 맞는 볼에 따른 내상은 약점 없는 타자에게도 허점을 만들 수 있다. 이종범(KIA)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종범은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데뷔 첫 해였던 1998년 6월24일 한신전에서 가와지리 데쓰로의 몸쪽 공에 오른쪽 팔꿈치를 정면으로 통타당하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종범의 약점으로 ‘몸쪽’ 공이 전가의 보도처럼 쓰여졌다.
하지만 몸에 맞는 볼은 행운을 뜻할 수도 있다. 사구는 출루율을 계산할 때 포함되는 기록이다. 몸에 맞는 볼이 많을수록 출루율도 높아질 수 있다. 이 같은 몸에 맞는 볼은 투수의 제구 실수 못지않게 타자의 능력도 포함된다. 타석에 최대한 바짝 붙어 투수들로 하여금 몸쪽 코스로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게끔 압박한 이후 사구를 얻어내는 것도 타자에게는 하나의 능력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와 같은 큰 경기에서 타자들은 대개 타석에 바짝 붙어 투수들에게 압박을 준다. 몸에 맞는 볼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근성이 없으면 ‘진짜’ 행운이 오지 않는 한 사구도 없는 법이다.
역사도 몸에 맞는 볼은 행운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5년 동안 몸에 맞는 볼 1위를 차지한 팀이 우승한 경우는 9차례로 확률은 36.0%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진출로 범위로 넓히면 14차례로 확률은 56.0%로 늘어난다. 몸에 맞는 볼 1위를 기록한 팀이 포스트시즌에도 오르지 못한 경우는 28.0%밖에 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몸에 맞는 볼 1위팀의 포스트시즌 진출 확률은 72.0%가 된다는 뜻이다. 올 시즌 몸에 맞는 볼 1위(88개)를 차지한 두산은 지난 2003년 현대(109개) 이후 4년 만에 몸에 맞는 볼 1위팀의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 두산과 SK의 사구
두산은 지난해에도 리그에서 가장 많은 사구(83개)를 얻어낸 팀이었다. 지난 2004년(96개)까지 포함하면 김경문 감독 부임 후 4년간 무려 3차례나 이 부문 전체 1위에 올랐다. 빅볼을 구사하는 김 감독이지만 선수들은 행운이든 불운이든 가리지 않고 몸에 맞는 볼로 자주 출루했다. 특히 2년 연속 몸에 맞는 볼 1위를 차지한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삼성(1984~85)·빙그레(1987~88)·삼성(1992~93)·LG(1996~97)·삼성(1997~98)·현대(1999~2000) 등 2년 연속 몸에 맞는 볼 1위를 차지한 6개 팀 가운데 우승이 2차례였고 준우승이 3차례였다. 두산은 적어도 준우승은 확보한 상태다.
올 시즌 두산은 몸에 맞는 볼을 가장 많이 얻었지만 몸에 맞는 볼을 두 번째로 많이 허용한 팀이기도 했다. 투수들의 사구가 75개로 전체 2위였다. 전체 1위 KIA(97개)가 주축 선수들이 줄부상을 입은 가운데 젊은 투수들의 제구력 난조가 치명타로 작용한 것을 감안하면 두산이 실질적인 1위일지 모른다. 올 시즌 각종 투수기록 지표에서 1위를 독식한 ‘철의 에이스’ 다니엘 리오스는 사구에서도 1위(16개)에 올라 ‘사구왕’이 됐다. 리오스뿐만 아니라 ‘고제트’ 고영민도 사구왕이었다. 무려 17개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하며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안 그래도 몸에 살이 없는 편인 고영민이라 그의 사구는 수치상으로나 체감상으로나 많았다.
SK도 몸에 맞는 볼에서 떼놓을 수 없는 팀이다. 사실 SK는 페넌트레이스에서 빈볼 시비의 논란에 선 바 있다. 초반부터 독주체제를 구축한 선두팀에 대한 집중 견제가 없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SK는 올 시즌 두산 다음으로 많은 사구(76개)로 1루에 출루한 팀이다. 투수들이 몸에 맞는 볼을 허용한 것도 67개로 4번째로 많은 평균 수준이었다. 오히려 몸에 맞는 볼을 마진으로 계산하면 SK는 ‘+9개’로 두산(+13개)-현대(+12개) 다음으로 피해를 당한 팀이었다. 물론 사구와 빈볼은 엄연히 다르지만 ‘빈볼팀’이라는 이미지와 주홍글씨가 굳어지고 있는 것은 SK에게 달갑지 않은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 1·2차전, 사구에 희비
올 시즌 유독 사구와 인연이 깊었던 SK와 두산은 한국시리즈에서도 사구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는 모습이다. 2연승으로 기선 제압에 성공한 두산은 1·2차전에서 도합 6개의 사구를 얻었다. 1차전에서는 ‘사구왕’ 고영민이 2개, 민병헌이 1개씩 얻었다. 하지만 2-0으로 두산이 근소하게 리드를 잡고 있던 7·8·9회에 나온 사구라 SK 투수들이 압박을 받은 느낌이 강했다. 2차전에서도 두산은 안경현·김동주·김현수가 사구를 하나씩 얻어냈다. 특히 채병룡의 공에 맞은 안경현은 오른쪽 엄지 골절로 남은 경기 결장이 불가피해졌다. 정황상 빈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김동주는 SK 선발 채병룡과 신경전을 벌이며 기싸움에서도 SK를 눌렀다.
두산에게 벤치 클리어는 터닝포인트로 사용되는 무기라 할 수 있다. 페넌트레이스에서 4월을 최하위로 마감할 정도로 고전한 두산은 5월 4일 LG와의 시즌 첫 경기에서 빈볼시비로 난투극을 벌인 바 있다. 안경현은 LG 봉중근의 공에 맞자마자 기다렸다는듯 마운드를 향해 달려갔고 두산 선수단도 그라운드로 몽땅 튀어나갔다. 당시까지 최하위였던 두산은 이후 25경기에서 17승을 쓸어담으며 분위기 대반전에 성공했다. 안경현·김동주·홍성흔 등 핵심 베테랑들은 물론 장원진이나 리오스 등 거의 전력 외된 베테랑과 외국인선수까지 벤치 클리어 때마다 합세해 선수단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2차전 빈볼시비와 벤치 클리어도 결과적으로 두산에 득이 됐다.
반면 페넌트레이스에서 두산 다음으로 많은 사구를 얻어낸 SK는 한국시리즈 1·2차전에서 사구를 단 하나도 얻지 못했다. 특히 1차전 선발이 ‘사구왕’ 리오스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아쉬운 대목. 물론 1차전에서 리오스의 제구력은 기가 막히는 수준이었다. 2차전에서 SK 타자들은 1차전 때보다 더 타석으로 바짝 붙어 투수들을 압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6회초 빈볼시비 이후 선발 채병룡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뼈아팠다. 이호준의 경기 전 의지와 달리 분위기 싸움에서 SK가 두산에 완패한 것이다. 이처럼 몸에 맞는 볼은 불운과 행운도 있지만 단합심까지 고취시키는 보이지 않는 미학까지 담고 있었다.
한편 두산 김경문 감독은 2차전 승리 후 몸에 맞는 볼에 대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김 감독은 “벤치에서 볼 때 SK 투수들의 사구는 고의가 아니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느낌이 있는데 맞히려고 작정하고 던진 것은 아니었다. 몸쪽으로 붙이려는 공에 우리 타자들이 맞은 것일 뿐이다. 고의는 없다. 야구의 볼거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감독도 몸에 맞는 볼이 두산에게는 행운, SK에게는 불운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안경현의 부상은 두산 입장에서 매우 아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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