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현, 한국시리즈 MVP로 극적인 부활
OSEN 기자
발행 2007.10.30 07: 46

[OSEN=이상학 객원기자] 방망이가 날카롭게 돌아간다. 교타자에게 어울리는 콤팩트한 스윙이다. 하지만 타구는 힘있게 쭉쭉 빨랫줄처럼 뻗어나간다. 라인드라이브로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타구에 팬들의 가슴은 뻥 뚫린다. 국내에서 가장 배트 스피드가 빠르기로 소문난 그에게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애칭이 붙었다.‘캐넌히터’. 다름 아닌 SK 김재현(32)이다. 페넌트레이스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하며 마음고생을 한 김재현은 한국시리즈에서 홈런과 결승타를 2개씩 때려내는 인상적인 활약으로 당당히 MVP를 수상했다. 최악의 해를 최고의 해로 바꾸는 그 순간에도 김재현의 타구는 시원하게 쭉쭉 뻗어갔다. ▲ 라이벌 김동주 올 시즌 페넌트레이스에서 김재현은 더 이상 김재현이 아니었다. 84경기에서 204타수 40안타, 타율 1할9푼5리·5홈런·19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2할대도 아니고 1할대였다. 지난해까지 12시즌간 통산 타율 2할9푼8리를 기록한 김재현이었기에 더욱 믿기지 않는 성적표였다. 하지만 김재현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됐다. 그래도 SK에서는 박경완-박재홍 다음으로 한국시리즈 출장 경험이 많은 선수가 바로 김재현이었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김재현은 두산 4번 타자 김동주와 라이벌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좌재현-우동주’로 고교야구를 양분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였다. 하지만 언론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이슈거리를 찾아야 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고교 시절 라이벌 김재현-김동주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올 시즌 두 선수는 라이벌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성적과 존재감에서 극과 극이었다. 라이벌이었지만 함께 날개를 펴고 난 기억이 적은 두 선수였기에 더욱 비교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7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3타수 1안타에 그친 김재현은 2차전에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다. 대타로도 출전할 것으로 보였으나 김성근 감독은 대타 타이밍을 놓쳤다. 김재현은 2차전에서 결국 결장했다. 하지만 이날 김재현의 이름은 수없이 팔려나갔다. 6회초 빈볼시비가 일어났을 때 김동주를 뜯어말리는 과정에서 김재현이 주목받은 것이다. 성난 코뿔소처럼 씩씩거리던 김동주가 화를 가라앉힌 것도 필사적으로 뜯어말린 김재현이 있기에 가능했다. 결국 김재현은 선수로서 경기에서 주목받은 것이 아니라 빈볼시비에서 평화유지군으로 주목받은 것이다. 경기를 뛰어야 할 선수로서는 달갑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3차전부터 3번 타자로 다시금 중용된 김재현은 두툼한 점퍼를 벗고 유니폼을 팔랑이며 타석에 나섰다. 수비가 어려운 만큼 지명타자로 출장하는 그는 방망이에 올인했다. 3차전에서 선제 결승 적시타를 때리며 포문을 열더니 6회초 빈볼시비에서는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강하게 반응했다. 4차전에서도 솔로 홈런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더니 5차전에서도 8회초 천금같은 결승 3루타를 작렬시켰다. 6차전에서도 결정적인 쐐기 솔로포를 터뜨렸다. 김재현이 펄펄 나는 사이 김동주는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김재현이 한국시리즈 6경기에서 23타수 8안타, 타율 3할4푼8리·2홈런·4타점으로 맹타를 휘두른 반면 김동주는 17타수 2안타, 타율 1할1푼8리·2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냈다. 한국시리즈 시작 전만 하더라도 비교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과거 라이벌이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극과 극. 누구 말마따나 역시 야구는 모르는 것이었다. ▲ 오기와 근성 “이상 SK 최고의 미남선수, SK 최고의 달변가와의 인터뷰였습니다”. 지난 27일 한국시리즈 5차전이 종료된 후 수훈선수 인터뷰를 마치는 박철호 SK 홍보팀장의 말이었다. SK 최고의 달변가는 ‘입담의 대가’ 이호준이었다. 그리고 SK 최고의 미남선수는 김재현이었다. 박 팀장의 말처럼 김재현은 미남이다. 결혼도 했고 나이도 서른 줄을 넘었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과거 LG 시절에는 세련된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몇 안 되는 선수이기도 했다. 올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재현은 화려했다. 1·2차전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3차전부터 6차전까지는 그야말로 김재현 시리즈였다. 특히 호쾌한 스윙으로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하는 타구를 날린 후에는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뽐냈다. 쭉쭉 뻗어나가는 타구를 응시하며 짧지만 강렬한 제스처를 취한 뒤 천천히 녹색 다이아몬드를 도는 모습은 화려함의 절정이다. 평상시 후배들에게 근엄한 선배였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일부러 더 큰 액션을 취하며 선수단 사기 진작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김재현을 그저 겉멋만 든 나머지 화려함에 사로잡힌 스타선수라고 생각하면 굉장한 오산이다. 그 누구보다 강한 오기와 근성을 지닌 선수가 바로 김재현이기 때문이다. 김재현은 한국시리즈 내내 잠을 편안히 자지 못했다. 그나마 6차전 전날 수면제를 먹고 8시간을 잔 것이 유일한 숙면이었다. 2차전이 끝난 뒤에는 “팀도 지고 나도 경기에 나가지 못해 너무 화가 났다. 그래서 휴식일에도 따로 훈련했다”고 털어놓은 김재현은 “항상 뒷 타자를 믿고 (주자를) 한 베이스만 더 보내주겠다는 생각을 갖자”고 동료들에게 강조했다. 주장은 김원형이지만 야수 중에서는 고참인 만큼 그의 ‘말발’은 먹혀들었다. 팀 플레이어로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말만 한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실천하고 실행했다. 특히 자존심을 버리고 배트를 짧게 쥐었다. 2004년 SK 이적 후 김재현은 중장거리 타자치곤 비교적 배트를 짧게 잡았다. 부족해진 배트 스피드를 보완하겠다는 의지였다. 멋보다는 실리였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재현처럼 빠른 배트 스피드에다 하체의 힘이 뒷받침되어 있으면 언제든 장타를 생산해낼 수 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기록한 안타 8개 중 5개가 장타였다. 한국시리즈 장타율 1위(0.783)도 김재현이었다. “나도 모르게 점점 배트를 짧게 쥐고 있다. 몇 타석 더 들어서면 배트를 반쯤 잡지 않을까”라며 농을 던지지만 그만큼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김재현의 체구는 거포는 물론 중장거리 타자로도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군살없이 웨이트로 단련된 탄탄한 상체와 두툼한 허벅지를 보면 왜 김재현이 중장거리 타자인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만큼 훈련을 많이 소화하며 자기관리를 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 어울리든, 그렇지 않든 강한 승부근성과 함께 팀 플레이어로서 팀에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결코 팀에 해가 되지 않으려 했다. 때문에 올 시즌 페넌트레이스 부진으로 후배들에게 ‘말말’이 통하지 않을 법했지만 김재현은 달랐다. “팀 성적이 좋았다. 거기서 내가 튀어버리면 팀이 분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후배들을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것이 한국시리즈에서 후배들이 잘 따르게 된 힘이 된 같다”는 것이 김재현의 말. 진정한 리더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행하고 따르게 만든다는 것을 김재현이 입증해냈다. 그것도 강한 오기와 투지로. 사실 고관절 무혈성 괴사라는 희귀병으로 고생하고 정든 LG와 각서파동을 겪을 때부터 김재현은 이미 잘생긴 선수가 아니라 오기와 투지로 중무장한 근성의 선수였다. 2007년 가을을 자신의 무대로 만든 김재현의 부활 스토리가 더욱 극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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