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자본주의 경제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에서 ‘인간은 칭찬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고 서술했다. 계약금 5억 원을 받고 SK에 입단한 김광현(19)은 데뷔 전부터 칭찬을 먹고 자랐다. 칭찬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김성근 감독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김광현에 대한 칭찬 퍼레이드는 ‘스포테인먼트’를 내걸고 흥행몰이를 준비한 SK의 마케팅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어쩌면 시즌 전 찬사들은 ‘가짜’ 칭찬이었는지도 모른다. ▲ 시련의 페넌트레이스 지난 4월 4일 프로야구 미디어데이 기자회견. 이진영과 함께 SK 선수 대표로 참석한 김광현은 ‘괴물’ 류현진(한화)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김광현은 “(류)현진이 형은 단순해서 타자들이 조금만 생각을 갖고 치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도발적이지만 풋풋했다. 그러나 이 일로 김광현은 졸지에 거만한 선수로 낙인 찍혔다. 보여준 것 없이 칭찬만 받은 신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같은 구절의 랩을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센스있고 패기 넘치는 대답이었다. 애석하게도 미디어데이의 저주는 페넌트레이스 시작부터 김광현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김광현은 4월 10일 삼성과의 문학 홈 개막전에서 데뷔 첫 선발 등판을 가졌다. 인천 인근 도시인 안산출신으로 연고지 인천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를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게도 비를 뿌리며 날을 어둡게 만들었다. 이 때문인지 김광현은 이날 경기에서 부진했다. 4이닝 동안 홈런 하나 포함해 8안타를 맞으며 3실점했다. 직구 최고 구속은 142km밖에 되지 않았고 볼 끝도 밋밋했다. 실망스러웠다. 시련은 계속됐다. 5월 13일 KIA와의 광주 원정경기에서 윤석민을 상대로 6이닝 무실점 호투로 데뷔 첫 승리를 챙겼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불펜으로 강등되더니 결국에는 5월을 끝으로 2군행을 통보받았다. 5월까지 김광현은 1승4패 방어율 5.14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구위가 별로였고 제구도 좋지 않았다. 5월까지 김광현의 9이닝당 볼넷은 무려 6.43개였다. ‘괴물’ 류현진과의 비교와 미디어데이 때 발언은 결과적으로 독이 됐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김광현에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고 말았다. ▲ 영광의 한국시리즈 10월 18일 발표된 SK의 한국시리즈 엔트리 명단에는 김광현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투수 11명 중 왼손은 가득염과 김광현뿐이었다. 한 순간이 중요한 단기전에서 왼손 투수가 가지는 값어치는 크다. 김광현의 엔트리 포함도 왼손 투수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사실 김광현은 7월 1군 복귀 후부터 달라졌다. 1군 복귀 후 9경기에서 2승3패 방어율 2.36을 기록했다. 특히 9이닝당 볼넷은 3.43개로 절반가량 줄었다. 동작이 컸던 투구폼을 간결하게 수정한 후 제구가 안정됐고 볼 스피드도 빨라졌다. 그런 김광현에게 특명이 주어졌다. 한국시리즈 4차전 선발로 예고된 것이다. 1차전에서 다섯 번째 투수로 구원등판, 이종욱과 김현수를 범타로 가볍게 처리한 것이 김성근 감독을 마음을 잡았다. 그러나 이날 두산 선발은 22승 투수 다니엘 리오스였다. 3승 투수 김광현이 바라보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었다. 경기 전 김광현은 “4차전은 SK에서 버리는 경기가 아니냐”는 짓궂은 질문에도 “져도 본전”이라고 되받아치며 여유를 잃지 않았으나 “사실 다리가 후들후들거린다”고 속내를 밝혔다. 표정은 밝았으나, 내재된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김광현은 “상대 선발이 리오스라서 오히려 더 부담이 없다”고 했다. 시즌 초반과는 180도 달라진 마음가짐이었다. 부담없이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은 1회말부터 이상 조짐을 보였다. 긍정적인 이상 조짐이었다. 2번 김현수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을 때 구속은 151km였다. 3번 고영민을 볼넷으로 출루시킨 후 맞은 4번 김동주 역시 헛스윙 삼진으로 잡았는 데 이번에는 131km 커브였다. 감이 좋았다. 6회 1사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내달렸다. 8회 1사까지 두산 타선을 1안타로 묶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145km 이상 강속구를 39개나 뿌리며 힘으로 두산 타자들을 제압했다. 특히 탈삼진 9개는 한국시리즈 한 경기 신인 최다 탈삼진으로 공교롭게도 종전 기록은 지난해 류현진이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기록한 7개였다. 김광현의 눈부신 피칭으로 SK는 리오스라는 벽을 무너뜨렸고 한국시리즈라는 거대한 승부의 물줄기마저 SK 쪽으로 틀었다. ▲ 야구를 즐기는 청년 ‘누가 보더라도 좋은 기회’라는 말은 말 그대로 누가 보더라도 좋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누가 보더라도 회의적인 것이 진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시리즈 4차전은 김광현에게 누가 보더라도 힘들었지만, 김광현은 정면 돌파를 통해 기회로 만들었다. 김성근 감독도 4차전 경기 후 “오늘 SK에 큰 투수가 탄생했다”고 칭찬했다. ‘진짜’ 칭찬이었다. 마치 13년 전 자신을 바라보듯 김재현은 “오늘 주인공은 (김)광현이다. 같은 팀 선배로서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감동받았다”고 했다. 이날 경기에서 김광현은 내내 마운드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소는 김광현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였다. 지난해까지 안산공고를 이끈 투수도 바로 ‘미소의 에이스’ 김광현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경기를 즐기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긍정적 태도가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을지라도 부정적 태도는 실패를 보장하고도 남는다. 19살 어린 투수임에도 김광현은 그 큰 경기를 즐겼다. “고교 때처럼 즐기려했다. 경기를 즐기고 집중하다보니 잘됐다”는 것이 김광현의 말. “리오스라서 더 부담이 없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시즌 초반 김광현이 가졌을 막중한 부담감을 떠올리면 부담없이 던졌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4차전의 영광은 김광현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4차전 선발승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5차전 경기 전에도 김광현은 덕아웃에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선배들의 훈련을 뒷바라지했다. 경기 후 축하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쏟아졌다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영락 없는 19살 야구청년의 풋풋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김광현은 더이상 칭찬에 흔들리지 않았다. 김성근 감독의 칭찬에 대해서는 “시즌 때 더 잘해야 한다”며 벌써부터 내년을 향한 의지를 다졌다. 물론 부담없이 즐기는 마음으로 야구를 하는 것이 김광현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앞으로도 더 즐기려고 노력할 것이다. 아직 야구할 날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양 어깨를 짓누른 부담감을 이제야 벗어던진 김광현. 그에게 2007년은 극심한 성장통을 이겨낸 시련의 영광으로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