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 역대 FA 최대어(1999~2002년)
OSEN 기자
발행 2007.11.05 14: 16

OSEN=이상학 객원기자] 프로야구 FA(프리에이전트) 시장이 지난 3일 FA 자격선수 공시를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올 FA 시장에서 최대 변수는 역시 ‘최대어 FA’ 김동주(두산)의 향방이다. 일본 진출설이 나돌고 있는 김동주가 일본으로 떠난다면 반사이익을 누릴 FA 선수들이 다수가 될 전망이다. 최대어 FA는 본인뿐만 아니라 나머지 선수들에게도 파급효과를 미친다는 점에서 초미의 관심을 모을 수 밖에 없다. 역대 프로야구 FA 시장을 뜨겁게 달군 최대어 선수들과 그들의 몸값 대비 활약 여부를 되짚어본다. ▲ 1999년 겨울 이강철-김동수 FA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때가 바로 1999시즌 종료 후였다. 당시 최대어는 송진우-이강철-김동수로 이어지는 ‘빅3’였다. 송진우가 3년간 7억 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화에 잔류한 반면 이강철과 김동수는 나란히 3년간 8억 원에 삼성과 계약, FA 이적을 결정했다. 몸값만 놓고 보면 이강철과 김동수가 FA 최대어였다. 이강철은 해태에서 10년간 매년 두 자릿수 승수와 함께 평균 13.2승에 방어율 3.17을 기록한 특급선발이었고, 김동수도 LG에서 10년간 통산 타율 2할6푼4리에 평균 13.5홈런을 친 공수겸장 포수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이강철은 삼성으로 이적한 2000년 첫 해 1승4패 방어율 7.30이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을 남겼다. FA 계약 전 해 무릎 부상으로 한 시즌을 쉰 여파가 없지 않았다. 결국 FA 계약 2년째였던 2001시즌 중 친정팀 KIA로 트레이드됐다. 김동수도 2년간 타율 2할3푼9리·16홈런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삼성의 주전 포수는 어느덧 진갑용의 몫이 되어있었다. 김동수도 2001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로 팀을 떠났다. 하지만 이강철과 김동수 모두 삼성을 떠난 후 다시 노익장을 과시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 2000년 겨울 홍현우-김기태 1999년 겨울이 FA 제도의 첫 시작이었지만 2000년 겨울은 FA 제도가 본격적인 부의 확대로 이어지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1999년에만 하더라도 이강철과 김동수의 8억 원이 최고액이었지만 2000년에는 10억 원은 물론 20억 원까지 FA 선수들의 몸값이 치솟아 오른 시점이다. 그 중심에 바로 홍현우와 김기태가 있었다. 일찌감치 재정난을 겪던 해태를 떠날 것이 확실시된 홍현우는 4년간 22억 원이라는 FA 대박을 터뜨리며 LG 유니폼을 입었고 김기태도 삼성과 4년간 18억 원이라는 대형계약을 맺으며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결과는 또 실패였다. 해태에서 11년간 연평균 타율 2할8푼6리·15.7홈런·63.5타점을 기록하며 해태의 전성기에 한 몫 한 홍현우는 LG에서 4년간 타율 2할4리·14홈런·63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4년 평균 성적이 아니라 합산 성적이었다. 홍현우는 지금도 1990년대 해태 전성기 멤버라기보다는 FA 먹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김기태도 계약 첫 해였던 2001년 44경기에서 타율 1할7푼6리에 머물렀다. 김응룡 삼성 감독과의 불화로 2군에 주로 머물렀다. 이후 SK로 이적해 3년간 타율 2할9푼4리를 기록했지만, 연평균 7.3홈런·43.7타점에 그쳤다. ▲ 2001년 겨울 양준혁 최대어 FA 선수들의 매머드급 계약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2001년 겨울에는 각 구단들이 몸을 사리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그 해 겨울에는 이 선수를 제외하면 대형 FA 선수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 ‘대도’ 전준호가 있었지만 당시에도 그의 나이는 32살이었다. 물론 이 선수도 나이먹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당시에도 그의 나이는 전준호와 같았다. 최고의 타자라는 상품가치가 있었지만 프로야구선수협의회 문제로 각 구단들에게 ‘찍힌’ 상태였다. 하지만 그때 삼성이 그를 낚았다. 그는 바로 양준혁이었다. 삼성은 김응룡 감독의 지시 아래 양준혁과 4년간 총액 27억 200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양준혁은 당시 기준으로 역대 FA 최고액에 계약하며 화려하게 친정으로 컴백했다. 9년간 연평균 타율 3할2푼9리·23.1홈런·91.6타점을 기록한 양준혁은 그러나 2002년 첫 해에는 타율 2할7푼6리·14홈런·50타점으로 부진했다. 양준혁마저 최대어 FA 먹튀 사슬을 끊지 못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후 3년간 연평균 타율 3할4리·24.7홈런·81.7타점으로 보란듯 맹활약했다. 2005년 부진만 아니었더라면 수치는 더 올라간다. 최대어 FA 역사에서도 양준혁은 타의 모범이었다. ▲ 2002년 겨울 박경완 2002년 겨울 FA 시장도 냉랭했다. 믿었던 양준혁마저 첫 해에는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내자 구단들에게 최대어 FA에 대한 불신감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 해 겨울 등장한 박경완이라는 이름은 남다른 믿음을 주었다. 당대 최고의 공수겸장 포수로 메리트가 컸기 때문이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투수리드의 최고봉’ 박경완을 잡으면 단순히 포수 포지션만 강화될 것이 아니라 투수들의 향상과 전체적인 팀 전력 증강을 꾀할 수 있었다. 결국 박경완은 현대를 떠나 SK와 3년간 19억 원을 받는 조건으로 FA 대박을 터뜨렸다. 박경완은 FA 계약 첫 해였던 2003년부터 타율 2할5푼·15홈런·60타점으로 활약했다. 포수로서 훌륭한 타격성적이었다. 결정적으로 포수로서 수비와 투수리드에서 돋보였다. 그해 10승 투수가 제춘모 하나밖에 없었던 SK가 창단 첫 한국시리즈에 진출, 현대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값진 준우승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데이터 야구를 펼친 조범현 감독과 박경완의 보이지 않는 역할과 궁합이 컸다. 2004년 34홈런으로 생애 두 번째 홈런왕에 오른 박경완은 계약 마지막 해였던 2005년에 기어이 SK를 팀 방어율은 전체 1위로 이끌었다. FA 계약 때 맺었던 3가지 옵션을 모두 달성, 연봉 4억 원에 2006년에도 계약을 갱신한 박경완은 최대어 FA에 대한 불신을 씻은 최초의 선수로 기억될 만하다. 양준혁-박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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