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도쿄돔 사나이로 만족할 수 없다'
OSEN 기자
발행 2007.11.12 10: 57

[OSEN=이상학 객원기자] SK 이진영(27)에게 도쿄돔은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지난해 3월5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과의 아시아라운드에 우익수로 선발 출장해 4회말 2사 만루에서 일본 니시오카 쓰요시의 빨랫줄 같은 타구를 따라가 다이빙캐치,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백만 불짜리 호수비를 펼친 곳이 바로 도쿄돔이었다. 그래서 붙은 닉네임이 그 유명한 ‘국민 우익수’다. 이진영이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 계기였다. 그러나 이날 호수비는 어떤 면에서 이진영을 타격보다 수비가 더 좋은 선수로 비쳐지게끔 한 것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2007년 11월, 이진영은 도쿄돔 중심에서 다시 한 번 외쳤다. 이번에는 수비가 아닌 타격이었다. ▲ 결정적 한 방 2006년 3월 도쿄돔에서 이진영은 믿기지 않는 수비로 일본 관중들을 잠재웠다. 한국은 그때까지 0-2로 뒤지고 있었고 만약 니시오카의 타구가 필드에 떨어질 경우 이미 그날 경기는 승부가 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진영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타구를 따라가 온 몸을 내던졌다. 모험성이 다분한 수비였지만, 이진영은 안정보다 모험을 택했고 결과는 대박이었다. 결국 한국이 3-2로 역전승한 데는 이진영의 수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수비에서 결정적 '한 방'이었다. 그로부터 1년 8개월 여가 흐른 2007년 11월11일 도쿄돔. 이번에는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였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코나미컵 우승을 향해 진군하던 ‘한국 챔피언’ SK는 예상대로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일본 챔피언’ 주니치 드래건스에 고전했다. 예선 첫 경기에서 SK에 한 방을 먹은 주니치는 확실히 마음가짐이 달랐다. 53년 만에 이룩한 재팬시리즈 우승마저 코나미컵 부진으로 희석될 조짐이었다. 예선 때처럼 선취점을 내준 주니치였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6회초 ‘한국산 안타 제조기’ 이병규의 투런 홈런으로 점수를 5-2로 벌렸다. 이어진 6회말 공격에서 SK가 김재현의 솔로 홈런으로 추격했지만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조금씩 패배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8회말. 2사 후 4번 이호준이 볼넷으로 출루했다. 타석에는 5번 이진영이 들어섰다. 이전 타석에서 선제 적시타를 포함 안타 2개를 쳤지만, 상대 투수는 4년 연속으로 55경기 이상 등판한 특급 셋업맨 오카모토 신야로 바뀌어 있었다. ‘철벽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로 이어지는 저승길의 안내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볼카운트 1-3에서 오카모토의 시속 123km 커브가 가운데 높은 곳으로 몰렸다. 이진영의 방망이가 잘 벼린 칼날처럼 돋아나 매섭게 돌았다. 맞는 순간부터 타구는 이미 홈런이었다. 이진영은 천천히 타구를 응시하며 걸었다. 승부를 5-5 원점으로 만드는 극적인 투런포로 홈런 비거리는 무려 135m였다. 이때 이 순간만큼은 이승엽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국민타자였다. 비록 SK는 9회초 대회 MVP를 차지한 이바타 히로카즈에게 중전 안타로 결승타를 맞으며 5-6으로 석패, 코나미컵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이진영의 결정적 한 방으로 마지막까지 주니치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며 결승전을 더욱 빛냈다. ▲ 타고난 타자 이진영은 WBC 7경기에서 20타수 3안타, 타율 1할5푼으로 타격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아시아라운드와 본선 8강 라운드에서 보여준 다이빙캐치와 빨랫줄 같은 홈송구로 경기 분위기를 반전시킨 호수비로 만회했다. 그러나 당시 이진영이 대표팀에 승선할 수 있었던 데는 전적으로 타격의 영향이 컸다. 1999년 데뷔한 이진영은 WBC 출전 전인 2005년까지 785경기에서 통산 타율 3할을 기록한 왼손 교타자였다. 통산 타율 3할은 2년이 지난 지금 현재도 그대로다. 9시즌 983경기 통산 타율이 역시 3할이다. 9시즌 900경기 이상 출장한 타자 가운데 역대 통산 타율 8위에 해당하는 고타율이다. 올 시즌에도 이진영은 타율 3할5푼을 기록했다. 그러나 80경기 220타수에서 기록한 3할5푼이었다.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물론 시즌 초반과 막판 부상으로 공백기가 많았던 것도 요인이지만, 김성근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으로 인해 고정적인 출장 기회를 얻지 못한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2타석 이하 경기만 해도 80경기 중 17경기였다. 군산상고 시절 타격 재질을 인정받아 쌍방울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1999년부터 줄곧 주전으로 출장한 이진영이었기에 올 시즌 SK의 무한경쟁 체제는 생소했다. 물론 이는 이진영에게만 해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타격감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이진영은 이병규(주니치)를 빼다 박았다. 타고난 타격 감각으로 공을 맞히는 재주가 뛰어나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노려치고, 기다리는 타격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다는 것도 그렇다. 2004년 생애 최고 타율(0.342)을 찍은 후 조금씩 타격에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도 그랬다. 물론 2005년에는 홈런이 20개로 늘어났지만 2006년에는 다시 11개로 줄었다. 갖고 있는 재능을 모두 펼쳐보이지 못한다는 지적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과거 LG 시절 이병규에게 충격적인 2군행을 지시한 김성근 감독에게도 이진영은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SK가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 한국시리즈에서 이진영은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4경기에서 9타수 1안타에 그쳤다. 마지막 6차전에는 아예 경기에도 출장하지 못했다. SK 창단멤버로서 프랜차이즈 스타를 자부하는 이진영에게는 자못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우승 후 이진영은 말했다. “코나미컵에서 다시 한 번 국민 우익수의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평소 이호준과 함께 '입담 콤비'로 유명한 이진영이지만 그래도 말에 무게는 있었다. 약속대로 코나미컵에서 이진영은 홈런 하나 포함 9타수 4안타 3타점으로 수비는 물론 타격에서도 국민 우익수에 어울리는 활약을 펼쳤다. 이진영은 주니치와의 결승전 패배 후 다시 한 번 말했다. “국제 경기뿐 아니라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좋은 선수로 인정받고 싶다.” 도쿄돔에서 외친 이진영의 다짐이다. 타고난 타자의 다짐, 그것도 약속의 땅이 되어버린 도쿄돔에서 외친 다짐이라 더욱 무게가 실린다. 이미 한국시리즈 직후 약속을 실현시킨 이진영이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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