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프로농구가 태동한 이래 가장 각광받은 포지션은 역시 포인트가드다. 외국인선수들이 골밑을 지배하며 상대적으로 빅맨과 포워드들이 열세에 놓이는 사이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는 포인트가드는 오히려 득세했다. 지난 11시즌간 배출된 정규리그 MVP 9명 중 무려 5명이 포인트가드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최고 포인트가드 논쟁은 매 시즌 프로농구에서 반복된 일이다. 하지만 2라운드 막판으로 접어들고 있는 올 시즌에는 이 선수가 최고 포인트가드로 굳어지고 있다. 바로 ‘한국판 제이슨 키드’ 안양 KT&G 주희정(30·180cm)이다. ▲ 과소평가된 포인트가드 프로농구 출범 후 정규리그 MVP를 차지한 포인트가드는 강동희-이상민-김승현-신기성-양동근이다. 프로농구에서 가장 각광받은 최고 포인트가드 계보이기도 하다. 프로 출범 초에는 강동희와 이상민의 대결로 점철됐고 그 이후에는 김승현·이상민·신기성 그 다음에는 양동근·김승현·신기성의 3자 대결구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강동희·이상민이 2자 대결구도가 진행될 때에도, 김승현·양동근 등 새 얼굴들이 가세해 3자 또는 다자 대결구도가 만들어질 때에도 주희정은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다. 어느덧 프로 11년차가 된 주희정은 이처럼 언제나 제 자리를 지켰지만 과소평가를 받아야했다. 물론 주희정이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시절도 있었다. 2000-01시즌, 수원 삼성(현 서울 삼성)을 정규리그-플레이오프 통합우승으로 이끌며 우승의 주역이 된 주희정은 당시 테크노 열풍에 힘입어 ‘테크노 가드’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0-01시즌 평균 11.6점·7.2어시스트·4.3리바운드로 맹활약한 주희정은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평균 11.7점·10.9어시스트·3.8리바운드로 맹활약하며 당당히 MVP까지 수상했다. 비로소 포인트가드는 물론이고 프로농구 1인자로 올라서는 듯했다. 그러나 그해 정규리그 MVP는 평균 25.7점이라는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과시하며 창원 LG의 공격농구 돌풍을 이끈 ‘캥거루 슈터’ 조성원에게 돌아갔다. 삼성에서 주희정의 시대는 짧았다. 2001-02시즌에는 ‘매직핸드’ 김승현이 데뷔하자마자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하며 대구 동양(현 오리온스)의 정규리그-플레이오프 우승으로 이끌며 최고 포인트가드로 우뚝 섰다. 2002-03시즌에는 부분적인 지역방어의 도입으로 외곽슛이 약한 주희정의 영향력이 더욱 감소되고 말았다. ‘국보급 센터’ 서장훈이 FA가 되어 삼성으로 이적한 뒤 빠른 농구를 펼치는 주희정과는 맞지 않았다. 주희정과 서장훈은 3시즌을 함께 했지만 최고 성적은 2004-05시즌 4강 진출이 고작이었다. 서장훈과 주희정의 이름값을 고려하면 기대를 한참 밑도는 성적이다. 결과적으로 두 선수는 상극이었던 셈이다. ▲ 돌파구 KT&G로 이적 2004-05시즌을 마친 후 주희정은 이정석과 맞트레이드돼 삼성에서 SBS(현 KT&G)로 트레이드됐다. 주희정이나 삼성이나 트레이드만이 모두가 살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05-06시즌 삼성은 플레이오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주희정은 성공을 증명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KT&G에서 다시 자신의 몸과 스타일에 맞는 스피드 농구를 구사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팀 성적이 따라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양동근이 등장해 주희정을 가렸다. 순수 포인트가드는 아니지만 주희정처럼 공수 양면에서 활발한 활동량이 돋보이는 양동근이 주희정이 갖지 못한 슛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 시즌부터 주희정은 완전히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삼성에서 3시즌간 보여준 위축된 모습도 완전하게 사라졌다. 테크노 음악을 연상시키듯 과거처럼 코트 전체를 정신없이 활보하며 상대를 괴롭혔다. 공격은 공격대로, 수비는 수비대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평균 10.2점·7.96어시스트·4.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KT&G를 6강 플레이오프에 올려 놓았다. 데뷔 후 처음으로 어시스트 부문 1위를 차지했고, 2000-01시즌 이후 6시즌 만에 다시 베스트5에도 선정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비록 정규리그 MVP-플레이오프 MVP를 휩쓸며 울산 모비스를 통합우승으로 이끈 양동근에게 또 한 번 가렸지만 말이다.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주희정은 3년간 연봉 4억 원을 받는 조건으로 KT&G에 잔류했다. 지난 시즌이 종료된 후 KT&G는 주희정을 비롯해 양희승·은희석 등 핵심선수들이 모두 FA로 풀렸다. 특히 FA 대어로 분류된 주희정과 양희승을 모두 잡을 수 있을지, 아니면 둘 중 하나를 택할지가 관건이었다. KT&G는 주희정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훌륭한 선택이 됐다. 지난 시즌 중 부임한 유도훈 감독은 현역 및 코치 시절 습득한 신선우 감독의 빠른 농구를 구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그 의지의 원천은 ‘스피드의 대명사’ 주희정의 잔류였다. KT&G 이적 후 주희정은 예의 자신감을 회복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KT&G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 포인트가드 주희정 시대 시즌 전 중하위권으로 평가된 KT&G는 9승6패를 거두며 당당히 공동 3위에 올라있다. 10개팀 가운데 가장 많은 속공(6.06개)을 성공시킴과 동시에 가장 적은 속공허용(2.20개)을 기록할 정도로 빠른 공수전환을 자랑하며 스피드 농구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당연히 주희정이 자리하고 있다. 올 시즌 15경기 모두 주전으로 선발출장, 평균 12.4점(국내선수10위)·8.3어시스트(2위)·5.0리바운드(국내선수6위)·1.73스틸(4위)로 공수 양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중이다. 어시스트는 데뷔 후 가장 많은 수치이며 득점과 리바운드도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무엇보다 장점을 그대로 살린 채 단점을 보완한 것이 돋보인다. 주희정의 최대 장점은 경기 내내 스피드를 내면서도 좀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체력이다. 주희정은 올 시즌에도 리그에서 5번째로 많은 경기당 36.2분을 소화하고 있다. 주희정은 데뷔 후 출전시간이 34분 밑으로 떨어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게다가 고질적인 약점인 3점슛도 완벽하게 보완했다. 올 시즌 3점슛 2.07개(8위)를 성공시키고 있는데 3점슛 성공률이 무려 43.1%(10위)에 달한다. 최근에는 오픈찬스가 아닌데도 과감하게 3점슛을 던질 정도로 슛에 자신감이 붙은 모습이다. 주희정은 “농구도 야구처럼 더블헤더를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체력에 관해서는 대단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팀 후배이자 룸메이트 양희종은 “(주)희정이 형이 농구를 이틀에 한 번 하는 것도 적다며 매일하자고 한다”고 귀띔할 정도. 실제로 주희정은 프로농구 최초로 500경기 출장을 돌파하는 등 역대 가장 많은 511경기를 소화했다. 지난 11시즌간 결장 경기수도 8경기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탄탄하고 자기관리도 철저하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지독한 슛 연습으로 외곽슛을 보완했다. “비시즌 동안 죽기살기로 슛 연습을 했다”는 것이 주희정의 말이다. 올 시즌 프로농구 포인트가드 구도도 재편되고 있다. 김승현(오리온스)은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개막전 이후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고, 신기성(KTF)은 외국인선수의 골밑 파괴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팀 사정에 휘말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군입대한 양동근(상무)은 2시즌간 공백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주희정이 포인트가드의 1인자로 올라선 것이다. 물론 신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김태술(SK)을 비롯해 표명일(동부)·이상민(삼성) 등이 있지만, 개인 활약의 파괴력과 팀 성적을 종합할 때는 주희정이 단연 돋보인다는 평이다. 바야흐로 포인트가드 판도에서 주희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