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말쑥한 정장 차림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휘황찬란한 황금장갑.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수상자들을 연상시키는 모습들이다. 한 해 프로야구를 정리하는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각 부문 수상자들은 최고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언제나 아쉬운 탈락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골든글러브는 투표인단이 워낙 많아 의외성 있는 결과가 심심찮게 속출, 당일 수상자와 탈락자의 희비가 더욱 엇갈렸다. 역대 골든글러브 아쉬운 탈락자 10명을 선정했다. ⑩ 1983년 2루수 김인식 MBC 청룡 원년멤버이자 몸에 맞는 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악바리’ 김인식은 올드팬들에게 추억의 스타로 기억된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강한 승부근성으로 MBC 붙박이 2루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골든글러브는 단 한 번도 타지 못했다. 김인식에게는 1983년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 100경기 모두 출장한 김인식은 타율 2할6푼3리·100안타를 기록했다. 타격랭킹 전체 25위였지만, 최다안타는 12위였다. 몸에 맞는 볼은 13개로 역시나 1위였다. 그러나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삼미 정구선에게 돌아갔다. 정구선의 타율(0.256)과 안타(91개)는 김인식보다 적었지만, 홈런이 15개로 공동 6위였다. 그해 김인식과 정구선의 득표 차이는 불과 2표. 여전히 역대 골든글러브 최소득표차로 기록돼 있다. ⑨ 2003년 외야수 이진영 2003년은 이진영이 본격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 시점이었다. 그 해 128경기에 출장, 타율 3할2푼8리를 기록했다. 타격랭킹 전체 5위에 해당하는 고타율이었다. 안타를 158개나 치며 이 부문 공동 4위에 오른 덕분이었다. 또한, 17홈런·70타점으로 괜찮은 펀치력을 과시했고 도루도 10개나 훔쳤다. 이진영과 함께 성장한 소속팀 SK도 창단 첫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를 낳았다. 그 중심에 이진영이 있었다는 점은 화석처럼 단단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해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에 최고의 선수들이 총집결했다는 것이 이진영에게는 불운이었다. 53홈런-142타점을 기록한 심정수는 물론 이종범-양준혁도 이진영이 넘기에는 높은 산들이었다. 이진영은 137표나 획득하고도 탈락했다.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득표 탈락자가 바로 2003년 이진영이다. ⑧ 2004년 외야수 전준호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다경기 출장기록(1956경기)의 주인공, 전준호는 그동안 보여준 것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 못했다. 골든글러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3차례나 수상했지만 1998년이 마지막이었다. 전준호에게는 2004년이 적잖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132경기에서 타율 2할9푼2리(20위)·142안타(11위)·88득점(7위)을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53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최고령 도루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전준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그러나 골든글러브에서 물을 먹었다. 그해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은 클리프 브룸바, 이진영에 이어 박한이와 이병규가 동점자가 되어 최초로 4명이나 수상했다. 모두 3할대 타자들이었다. 전준호도 120표를 얻었지만 결국 역대 최다득표 탈락 부문 3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⑦ 2002년 1루수 장성호 장성호는 꾸준함의 대명사다. 비록 올해 부상 악재로 10년 연속은 물거품됐지만 사상 두 번째로 9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한 대타자다. 그러나 골든글러브는 단 한 번도 타지 못했다. 특히 2002년이 장성호에게는 뼈아픈 기억이다. 꾸준함으로 대변되는 장성호가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펼친 해가 바로 2002년이지만 골든글러브는 다시 한 번 장성호를 외면했다. 그해 장성호는 133경기 전경기 출장, 타율 3할4푼3리를 기록하며 당당히 타격왕을 차지했고, 최다안타(165개)에서도 공동 2위에 올랐다. 그러나 장성호의 포지션이 1루수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1루의 벽에는 다름 아닌 이승엽이라는 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도 이승엽은 47홈런-126타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남겼다. 이승엽은 1997년부터 2003년까지 1루수 부문 7연패를 달성하며 장성호를 번번이 좌절시켰다. ⑥ 1994년 포수 김동기 1994년은 신바람 야구의 LG 못지않게 태평양의 돌풍도 대단했다. 그 중심에 바로 포수 김동기가 있었다. 그해 김동기는 119경기에서 타율 2할6푼4리·15홈런·50타점으로 만만찮은 방망이 실력을 보여주며 태평양 안방을 지켰다. 그러나 1994년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LG 김동수에게 돌아갔다. 김동수는 95경기에 출장, 타율 2할8푼8리·6홈런·42타점을 기록했다. 타격성적에서 김동기가 김동수에게 뒤진 것이라고는 타율밖에 없었다. 특히 24경기나 더 뛰었다는 점은 분명 김동기가 김동수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투표인단은 서울 구단 LG의 우승을 이끈 ‘스타’ 김동수를 택했다. 물론 김동수가 안방을 지킨 LG의 팀 방어율이 전체 1위(3.14)였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러나 2표 차이는 김동기에게 너무 큰 아쉬움이다. ⑤ 2004년 포수 박경완 역대 페넌트레이스에서 MVP를 차지한 타자 15명 중 13명이 그해 홈런왕이었다. 홈런왕은 MVP 보증수표이기도 하지만 골든글러브 보증수표이기도 하다. 1985년 공동 홈런왕에 오른 이만수와 김성한은 각각 포수-1루수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수비율로 골든글러브를 시상한 1982년 원년을 제외한 1983년부터 지난해까지 24년 동안 홈런왕이 되고도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한 경우는 2차례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2004년 박경완이었다. 그해 34홈런으로 생애 두 번째 홈런왕이 된 박경완은 132경기에서 2할9푼5리로 타율도 좋았다. 그러나 골든글러브는 홍성흔의 몫이었다. 홍성흔은 133경기 전경기 출장해 타격랭킹 전체 3위(0.329)에 오르며 포수 최초의 최다안타왕(165개)이 됐다. 그러나 그 해 홍성흔이 포수로 출장한 경기는 88경기인 반면 박경완은 무려 126경기였다. ④ 1997년 투수 김현욱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에는 역대 대체로 큰 이견이 없었다. 자리가 한 자리밖에 없지만 한 해 최고의 투수를 선정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97년도 마찬가지로 기억된다. 1997년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이대진이다. 28경기에 등판, 180⅔이닝을 던져 17승6패1세이브 방어율 3.14를 기록했다. 선발투수 중 최다승을 올렸고 소속팀 해태도 한국시리즈 사상 9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다승과 방어율 1위에 오른 김현욱을 외면한 것은 애석함으로 남아있다. 그해 김현욱은 무려 70경기에서 157⅔이닝을 소화하며 20승2패6세이브 방어율 1.88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냈다. 쌍방울도 페넌트레이스 3위에 오르며 돌풍을 이어갔다. 하지만 김현욱은 20승이 모두 구원승일 뿐만 아니라 김성근 감독의 기록 만들어주기였다는 이유로 끝내 투표인단으로부터 외면받아야 했다. ③ 1998년 1루수 우즈 2004년 박경완의 경우에서 나타나듯 홈런왕이 골든글러브를 100%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홈런왕의 절친한 '친구' 타점왕이 따라붙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역대 프로야구에서 홈런과 타점 2관왕을 차지한 경우는 모두 18차례. 이 가운데 무려 17차례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홈런·타점 타이틀 동시석권의 골든글러브 수상 확률은 무려 94.4%나 된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바로 1998년 타이론 우즈였다.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된 첫 해였던 그해 우즈는 42홈런으로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했다. 126경기 모두 출장해 타율 3할5리에다 103타점으로 타점왕에도 올랐다. 당당히 페넌트레이스 MVP까지 거머쥐었다. 그러나 골든글러브는 라이벌 이승엽에게 빼앗겼다. 수비율로 시상한 1982년을 제외하면 시즌 MVP가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한 것도 1998년 우즈가 유일하다. ② 2001년 지명타자 호세 2001년 펠릭스 호세는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나. 그 해 호세는 117경기에서 타율 3할3푼5리·36홈런·102타점을 기록했다. 타격 4위, 홈런 2위, 타점 공동 3위였다. 무엇보다 62경기 연속 출루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출루율 부문 역대 1위(0.503)를 기록했다. 역대 한 시즌 최다 볼넷(127개)과 역대 2위 고의4구(28개)를 얻을 정도로 철저하게 견제를 받은 덕 아닌 덕이었다. 호세는 출루율과 함께 장타율(0.695)도 전체 1위였다. 장타율 역시 역대 5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이었다. 게다가 출루율과 장타율을 합한 OPS는 1982년 원년 백인천(1.237) 다음으로 높은 1.198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인 시즌을 보낸 호세였지만 골든글러브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해 지명타자 부문 경쟁을 벌인 수상자 양준혁과의 득표차는 불과 2표였다. 호세로서는 시즌 막판 삼성 배영수에게 날린 ‘핵펀치’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괘씸죄를 적용하더라도 호세의 성적은 너무 독보적이었다. ① 2001년 포수 박경완 2004년의 결과는 2001년에 비하면 약과였다. 불운아는 또 다시 박경완이다. 2001년 박경완은 130경기에서 타율 2할5푼7리·24홈런·81타점·21도루를 기록했다. 포수 최초의 20-20 클럽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타율은 다소 낮았지만 홈런 공동 10위, 타점 14위에 올랐다. 포수 중에서는 단연 두드러지는 타격성적이었다. 또한, 115경기에서 포수로 출장해 안방을 지키며 소속팀 현대를 팀 방어율 1위(4.34)로 이끌었다. 그러나 골든글러브는 홍성흔에게 돌아갔다. 홍성흔은 122경기에서 타율 2할6푼7리·8홈런·48타점을 기록했다. 타율을 제외하면 박경완에게 모든 타격성적에서 뒤졌다. 홍성흔이 안방을 지킨 두산의 팀 방어율도 전체 6위(4.96)에 그쳤다. 하지만 홍성흔에게는 우승 프리미엄이 있었다. 2001년 두산은 10승 투수 한 명 없이 극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연출하며 박경완의 20-20 클럽을 비롯해 나머지 팀 선수들의 활약상들을 모두 다 가려버렸다. 그래도 당시 박경완이 얻은 121표는 최다득표 탈락 2위에 해당하는 득표였다. 지난 7일 제일화재 프로야구대상(일간스포츠 공동제정) 시상식서 올해의 수비상을 받은 뒤 사회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박경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