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도입된 외국인선수 제도는 국내 장신 선수들에게 재앙 같은 일이었다. 외국인선수 제도 도입으로 득을 본 이들은 포인트가드들과 정통 슈터 그리고 서장훈·김주성 같은 소수의 특급 토종빅맨들이었다. 서장훈과 김주성의 경우도 피해자가 될 수 있겠으나 이들은 외국인선수와의 경쟁을 통해 기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그러나 수많은 장신 포워드들이 프로에서는 사장되거나 실력을 발휘하는 데 시간이 걸려야했다. 하지만 인고의 세월을 거친 올 시즌, 장신 포워드는 프로농구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를 조짐이다. ▲ 피할 수 없는 변신 프로농구 원년 토종 득점왕은 당시 대구 동양 소속 전희철(198cm)이었다. 평균 23.1점을 올리며 득점랭킹 전체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전희철 외에도 정재근(21.1점)·김영만(20.4점) 등 장신 포워드들이 국내선수 부문 득점 1~3위를 점거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외국인선수가 장·단신 1명씩 뽑는 제도라 국내 장신 포워드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01시즌부터 선발제도가 신장 합계 제한으로 바뀌면서 각 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골밑에서 활약이 가능한 빅맨 2명으로 외국인선수들을 선발했다. 토종 정통센터들은 물론 장신 포워드들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변화에 살아남지 못하면 곧바로 사장이었다. 고려대 시절까지 센터를 맡던 이규섭(삼성,198cm)은 그래도 가장 잘 된 경우였다. 하지만 이규섭의 경우는 처음부터 정통 빅맨은 아니었다. 내외곽을 활발하게 누비며 슛을 던졌고 스피드도 빅맨치곤 빨랐다. 팀 사정상 센터로 활약했지만, 움직임은 스몰포워드와 파워포워드의 중간선상인 ‘3.5번’이었다. 타고난 슛감각이 있었기에 이규섭의 프로무대 적응은 빨랐다. 하지만 이규섭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완전히 장신슈터로 바뀌었다. ‘국보급 센터’ 서장훈이 있는 팀 사정이 있었지만, 한층 높아진 외국인선수 수준에서 골밑 플레이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이규섭은 장신 포워드 슈터화의 실질적인 선두주자가 됐다. 그러나 모두가 이규섭처럼 변신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규섭처럼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단한 송영진(KTF,198cm)은 프로 적응에 무려 4시즌이 걸렸다. 데뷔 초 외국인선수들과의 골밑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무리하게 웨이트를 불렸으나 오히려 스피드를 비롯한 운동능력을 상실하며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선수로 전락했다. 창원 LG에서 부산 KTF로 이적한 이후 외곽슛을 보완하고 골밑 컷인 플레이를 적극적으로 펼치며 뒤늦게 이름값을 했다. 그러나 송영진 역시 김주성과 함께 중앙대 골밑을 이끈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외 2000년 이후 데뷔한 장신 포워드 가운데 프로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선수는 이규섭과 송영진 그리고 슈터에 가까운 방성윤(195cm)을 제외하면 전무했다. 대다수가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 변화, 새로운 바람 올 시즌을 앞두고 KBL은 2004-05시즌부터 시행한 외국인선수 자유계약제를 종전 트라이아웃-드래프트제로 환원시켰다. 외국인선수 비중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내린 결정이었다. 또한, 지난 시즌부터 외국인선수 한 명 출전제한을 2-3쿼터로 늘렸다. 국내선수들, 특히 빅맨과 장신 포워드들을 살리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외국인선수 한 명만 출전하는 쿼터에 오히려 가드들이 득세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팀 조직력에 녹아드는 데 시간이 걸리는 장신선수들을 살리기보다 보다 더 조직적이고 섬세한 플레이를 펼쳐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드들을 중용하는 것이 대세였던 것이다. 하지만 올 시즌 외국인선수 수준이 하향평준화되자 빅맨들에다 장신 포워드들까지 활기를 찾고 있다. 장신 포워드의 성공모델, 이규섭은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올 시즌 19경기에서 데뷔 후 가장 많은 평균 18.0점을 올렸다. 국내선수 득점 2위이자 전체 득점 12위에 해당하는 고득점이다. 올 시즌 리그에서 3번째로 많은 경기당 평균 2.74개의 3점슛을 성공시켜 쾌조의 슛 감각을 과시하고 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3점슛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골밑 득점의 빈도를 높여가며 괜히 장신 포워드의 표본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최근 발목 부상으로 전열에서 잠시 이탈했지만 달라진 변화에 가장 잘 대처하는 선수다운 활약을 펼치고 있다는 평이다. 이규섭은 방성윤-김병철-함지훈 다음으로 많은 경기당 평균 4.26개의 자유투를 얻어낼 정도로 공격에서 적극적이다. 파울이 많이 나는 골밑에서도 꽤 많이 움직인 덕이다. 지난 시즌과 달리 외곽에서 받아먹는 득점이 많이 줄었다. 이한권(197cm)의 약진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올 시즌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하며 농구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이한권은 데뷔 후 가장 많은 평균 14.4점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선수 득점 5위에 올라있다. 성균관대 시절까지 빅맨으로 골밑에서 활약한 이한권은 프로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대학시절부터 슛이 좋아 슈터 변신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권은 올 시즌 당당히 리그를 대표하는 국내 득점원으로 발돋움했다. 무엇보다 출전시간을 확실하게 보장받은 덕이 가장 크지만, 정확한 3점슛과 활발한 미들라인 움직임을 보이며 이규섭과 함께 장신 포워드의 새로운 표본을 열어젖히고 있다. 올 시즌 이한권은 2점슛과 3점슛 시도가 95회로 같을 정도로 공격 밸런스의 균형을 이뤘고, 자유투도 경기당 평균 3.63개를 얻어내고 있다. 이규섭과 이한권 외에도 정훈(KCC), 김일두(KT&G), 김영환(KTF), 박상오(KTF)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정훈은 처음부터 빅맨이 아니었다. 성균관대 시절 ‘2m 가드’였지만 프로에서는 포워드 전환에 실패했었다. 하지만 차차 적응세를 보이고 있다. 부상으로 기량을 채 꽃피우지 못한 김일두도 공수·내외곽에서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로 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고, 신인 김영환도 슈터로만 한정되지 않고 힘과 높이를 앞세워 골밑에서도 곧잘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김일두와 김영환은 고질적인 부상만 아니라면 가까운 미래 제2의 이한권이 될 수 있는 잠재력 있는 장신 포워드들로 평가된다. 중앙대 시절 센터로 활약한 신인 박상오도 프로에서는 플레이 범위를 넓혔다. 이외에도 스윙맨 방성윤이나 빅맨 함지훈도 넓은 의미에서는 장신 포워드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사장된 장신 포워드가 이제는 달라진 시대를 맞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규섭-이한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