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14일(한국시간)은 메이저리그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린 순간으로 남게 됐다.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 1994년 선수노조의 파업에 이은 최대 위기가 발생하면서 메이저리그의 앞날은 한치도 알 수 없게 됐다. 이른바 '스테로이드 시대'의 종언이다. 이날 발표된 미첼 리포트 결과 수많은 스타들이 금지 약물에 손을 댄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의 영웅' 로저 클레멘스(45)가 약물 상습 복용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다. 클레멘스가 약물에 손을 댔으면 이번에 밝혀지지 않은 선수들의 약물 복용 사례는 얼마나 많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사실 메이저리그는 금지약물에 관한 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리그 출범 100년이 훨씬 넘도록 금지 약물 규제책이 거의 없었고, 여론의 역풍을 맞고서야 최근 몇 년간 징계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였을 뿐이다. 선수는 물론 구단, 사무국 관계자들이 알면서도 쉬쉬했다는 의혹의 눈길도 적지 않다. 지난 2005년 3월 열린 미 의회의 '금지약물 청문회' 당시의 일이다. "선수들의 약물 복용 실태를 알고서도 은폐하지 않았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에 버드 실릭 커미셔너와 도널드 퍼 선수노조 위원장은 부인으로 일관했다. 평소 사사건건 대립해오던 이들은 이날 만은 나란히 앉아 잔뜩 겁먹은 얼굴로 '입맞춰' 모른다고 했다. 미첼 리포트가 충격적인 것은 1990년대 이후 야구를 살린 주역들이 '검은 주사기'의 도움을 받았다는 데 있다. 스테로이드 복용을 사실상 시인한 마크 맥과이어, 이미 기소된 배리 본즈에 이어 클레멘스는 야구 역사상 손에 꼽을 대선수들이다.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놀런 라이언과 같은 '전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성적을 남겼다. 이들 '야구 영웅'들의 위대한 영광 뒤에 스테로이드라는 약물의 힘이 있었다는 건 순수함과 도덕성을 제일로 치는 미국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선다. 94년 파업 당시와 같은 야구 인기 대폭락도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대다수 미국인들은 야구 선수들이 터무니 없이 많은 연봉을 받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해온 터였다. 파업 당시 위기를 넘어선 것이 엄청난 홈런포와 탈삼진 개수였다면 이번 사태는 '13년 전 위기는 결국 인위적인 과정과 결과에 의해 극복된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야구는 상당 기간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을까.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월드시리즈를 무산시킨 파업 사태가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경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단과 선수들이 밥그릇 싸움으로 일관하다 정상적인 리그가 중단되면서 팬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야구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 팬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번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내년 리그 운영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경기는 예정대로 열릴 것이고, 따듯한 오후 햇살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야구장을 찾을 것이다. 본즈의 선례도 있다. 스테로이드 파문으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한 몸에 받은 본즈이지만 그가 출장하는 경기장은 인산인해였다. 샌프란시스코 홈팬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를 격려했고, 타 구단 팬들은 구장을 찾아 그를 비난했다. 메이저리그가 4년 연속 관중 신기록을 세우는 데 조금도 장애요인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적발된 선수의 규모에서 본즈 한 명의 사례와는 다르다. 리그와 구단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스테로이드가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데다 앤디 페티트, 미겔 테하다 등 최근 계약을 했거나 팀을 옮긴 현역 스타들이 상당수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해진다. 야구를 외면해온 사람은 "그럴줄 알았다"며 손가락질 할 것이고, 몰랐던 팬들은 충격을 가라앉히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프로스포츠는 '과거'를 먹고 산다. 과거의 영웅담은 '전설'로 승화되고, 평범했던 일상도 '역사'가 된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스타가 명멸해간 역사의 현장"이란 수식어는 세계 모든 프로 리그들이 상투적으로 써먹는 '옛날 얘기 마케팅'이다. 화려하고 찬란했으며 고결하다고 여겨진 과거가 '타락한 현실'로 드러난 오늘 리그와 미디어의 홍보 문구를 철썩같이 믿어온 팬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혼란과 어지러움이 가라앉을 때 그들의 머리와 마음은 어떻게 변해갈까. 그리고 어떤 행동을 취할까. 이번 사태의 후폭풍을 예상하기 어려운 이유다. workhorse@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