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수 왕국' 두산의 달갑지 않은 전통
OSEN 기자
발행 2007.12.15 08: 49

[OSEN=이상학 객원기자] 두산은 예부터 전통이 있는 포수왕국이다. 1980년대에는 김경문·조범현, 1990년대에는 김태형·최기문·진갑용·홍성흔 등 내로라 하는 포수들이 차례로 반달곰 유니폼을 입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2000년대에는 1999년 신인왕 홍성흔의 1인 독주체제가 유지됐지만 올해부터 변화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복병’ 채상병이 뜨면서 홍성흔을 밀어낸 것이다. 홍성흔은 김경문 감독과 구단에 트레이드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상황이다. 두산은 전신 OB 시절부터 포수왕국이었지만 왕국의 포수들은 대다수 달갑지 않은 뒤끝을 남겼다. 두산이 홍성흔건을 더욱 조심해서 다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1980년대 1982년 원년 OB의 안방은 김경문과 조범현이 번갈아가며 지켰다. 김경문이 51경기, 조범현이 48경기 출장했다. 하지만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 박철순과 부둥켜안은 포수는 김경문이었다. 김경문은 박철순·최일언·계형철 등 강속구를 던지는 에이스들과 호흡을 맞추며 조범현보다 조금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조범현도 만만치 않았다. 조범현은 장호연·박상렬 등 기교파 투수들과 함께 배터리를 이뤘다. 1984년에는 조범현이 77경기, 김경문이 36경기 출장해 OB의 팀 방어율을 2.53까지 끌어내렸다. 이는 프로야구 역대 한 시즌 최저 방어율로 기록돼 있다. 투수들의 능력도 좋았지만 수비형 포수 조범현과 김경문의 힘도 매우 컸다. 이듬해인 1985년, OB에는 또 하나의 특급포수가 영입됐다. 1984년 LA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 포수 김영신이었다. 그러나 김영신에게 원년멤버로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 김경문과 조범현의 벽은 꽤 높았다. 특히 조범현은 김영신이 입단한 1985년 87경기에서 도루저지율 5할4푼1리를 기록했다. 이는 2003년 KIA 김상훈(0.554)이 깨기 전까지 역대 한 시즌 최고 도루저지율이었다. 김영신은 1985·1986년 2년간 겨우 22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그것이 김영신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1986년 봄 김영신은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투신자살이었다. 이후 OB는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김영신의 등번호 54번을 영구결번으로 처리했다. 김경문과 조범현의 끝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김경문은 1989년을 끝으로 OB를 잠시 떠났다.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태평양으로 트레이드였다. 태평양은 김동기의 백업포수로 쓰기 위해 현금 2600만 원에 김경문을 데려왔다. 그러나 1년 만에 태평양은 다시 김경문을 송재박과 트레이드를 통해 OB로 돌려보냈다. 공교롭게도 두 차례 트레이드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김성근 감독이었다. 김경문은 1991년을 마친 후 은퇴했지만 OB에서 온전하게 선수생활을 마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었다. 조범현도 1991년 OB에서 방출돼 김성근 감독이 새로 부임한 삼성으로 이적, 1992년 은퇴했다. OB는 1980년대를 이끈 수비형 명포수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 1990년대 1990년대의 시작은 김경문-조범현의 대를 잇는 ‘수비형 포수’ 김태형이었다. 1990년 입단한 김태형은 조범현과 김경문의 노쇠화를 틈타 빠르게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1992·1994년에는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2001년까지 12년 동안 반달곰 유니폼만 입고 은퇴한 김태형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제 몫을 하는 알짜배기 포수였다. 은퇴 후에는 두산의 배터리코치로 변신해 변함없는 ‘베어스맨’으로 활약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반달곰 마크를 떼지 않은 몇 안 되는 포수가 바로 김태형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입단한 수비형 포수 조경택은 빛을 보지 못했다. 1992년 입단 후 3년간 1군에서 34경기에 뛴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조경택은 1995년 한화로 이적한 뒤에야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94년 입단한 이도형은 그동안 OB를 지킨 수비형 포수들과 달리 타격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OB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1995년에는 팀에서 세 번째로 많은 14홈런을 때려내며 거포 본능을 과시했다. 특히 그 해 홈런 14개 중 12개를 잠실에서 기록, ‘잠실 홈런왕’에도 올랐다. 그러나 포수로는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95경기 중 54경기에만 포수로 출장했다. 포수마스크는 김태형이 더 많이 썼다. 실질적으로는 김태형-이도형의 2인 체제였다. 이후 이도형이 1997시즌을 끝으로 군입대하고, 김태형이 잦은 부상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OB는 포수 걱정이 없었다. 국가대표 포수들이 줄줄이 입단한 덕분이었다. OB의 포수는 마치 끊임없이 재물이 쏟아지는 화수분과 같았다. 1996년에는 최기문, 1997년에는 진갑용이라는 국가대표 출신 특급포수들이 차례로 합류했다. 최기문의 계약금은 2억3000만 원이었고, 진갑용의 계약금은 3억8000만 원이었다. 두 포수에 대한 구단의 기대치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 그러나 두 선수 모두 반달곰에 몸담은 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최기문은 입단 첫 3년간 2군과 1군 백업을 전전하다 1999년 차명주와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진갑용 역시 입단 3년째였던 2000년 시즌 중 이상훈과 맞트레이드돼 삼성으로 이적했다. 그래도 두산은 여유 있었다. 계약금 2억 원에 입단한 국가대표 출신 포수 홍성흔이라는 최후의 보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 김경문·조범현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맺지 못했고 최기문·진갑용은 반달곰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포수왕국이었지만, 결코 석연치 않은 전통이었다. 2002년에는 1995년 우승주역이었던 이도형이 강인권과 맞교환돼 한화로 이적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막판 치열했던 적자생존 포수경쟁의 최종 승자는 홍성흔이었다. 홍성흔은 신인왕을 차지한 1999년부터 지난해까지 두산 안방을 독점했다. 물론 무릎 부상으로 장기 결장한 2003년과 타격에 조금 더 집중한 2004년에는 베테랑 백업포수 강인권이 잘 뒷받침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두산이 OB 시절 포함 거의 유일하게 포수난에 시달린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두산의 안방에도 급반전이 일어났다. 홍성흔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2000년대 두산 안방은 홍성흔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그러나 올해 홍성흔이 계속된 부상을 당하며 주춤한 사이 공익근무를 마치고 복귀한 채상병이 빈 자리를 꿰찼다. 채상병은 지난 2004년 두산이 롯데로 FA 이적한 정수근의 보상선수로 데려온 문동환을 한화에 내주고 받은 포수였다. 포수 출신 김경문 감독은 남다른 포수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채상병은 이적 후에도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병역비리에 휘말렸다. 실패작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 채상병이 뒤늦게 빠른 적응속도를 보이며 ‘포수 홍성흔’의 공백과 그림자까지 메워버렸다. 김경문 감독은 2005년부터 홍성흔에게 1루수 또는 지명타자로의 전향을 권유했다. 계속된 부상으로 선수생명이 짧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포수로서 생명이 얼마 안남았다는 뜻이었다. 그 우려는 올해 현실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현재 두산에는 주전으로 자리를 굳힌 채상병뿐만 아니라 백업포수로는 제격인 김진수도 있다. 김진수도 경남고 시절에는 이름있는 포수 유망주였다. 여기에 2차 1번으로 지명한 인천고 출신 신인포수 김재환도 내년부터 합류한다. 두산의 포수자원은 다시금 풍부해졌고 굳이 ‘포수 홍성흔’이 필요하지 않아졌다. 하지만 홍성흔은 ‘포수 홍성흔’으로서 자아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장고 끝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홍성흔도 어쩌면 선배 포수들처럼 이적이라는 이별의 전철을 밟고 있는지 모른다. 두산팬들은 더 이상 반달곰 안방마님이 팀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전통이 되어 반복될 조짐이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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