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포인트가드 또는 슈터들이 최고 전쟁을 벌이는 것은 한국 프로농구에서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외국인선수들에게 밀린 토종 빅맨들은 달랐다. 언제나 서장훈(33·KCC, 207cm)과 김주성(28·동부, 208cm)만이 외국인선수들과 일합을 겨루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대부분 사장되고 말았다. 하지만 전반적인 외국인선수 수준이 하향평준화된 올 시즌 드디어 토종 빅맨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의 서장훈과 김주성에 함지훈(23·모비스, 198cm)과 귀화 혼혈 선수 이동준(27·오리온스,198cm) 등 신인들이 새로 합류했다. 한 시즌에 토종 빅맨 4명이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은 프로농구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공격형 빅맨 서장훈 프로농구 출범 이후 득점랭킹은 외국인선수들의 독차지였다. 아직 토종 득점왕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 근접한 경우는 있었다. 바로 서장훈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1999-00시즌 평균 24.2점을 올리며 득점랭킹 전체 2위에 올랐다. 역대 프로농구에서 국내 선수가 득점랭킹 전체 5위 내에 든 경우는 모두 7번. 인원수로는 3명뿐이다. 서장훈 외에 현주엽과 조성원이 있었다. 그러나 현주엽과 조성원은 딱 한 차례만 5위 내로 들었다. 하지만 서장훈은 무려 5차례나 득점랭킹 전체 5위 안에 올랐다. 한국농구 사상 최고의 공격형 빅맨다운 업적. 정규리그 통산 9411득점으로 이 부문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다. 2위 문경은(SK·8533득점)과도 차이가 꽤 난다. 프로농구 최초의 1만 득점도 서장훈의 몫이 될 것이 확실하다. 서장훈은 빅맨치곤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지녔다. 웬만한 정통 슈터들을 능가하는 부드러운 슛터치는 장기인 중거리슛의 밑바탕이었다. 부드러운 슛터치는 또 다른 장기인 턴어라운드 페이드 어웨이 슛으로도 발전됐다. 큰 신장에서 나오는 타점 높은 슛은 결코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에는 골밑 몸싸움과 위치 선정에서도 외국인선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서장훈을 보유한 팀들은 언제나 서장훈을 중심으로 공격의 시작점을 풀어나갔다. 이러한 부담 속에서도 서장훈은 꾸준함이라는 최고의 덕목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골밑에서 미들라인 그리고 근년에는 좋은 의미로든 또 그렇지 않은 의미로든 외곽까지 공격범위를 넓히며 최고의 공격형 빅맨다운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서장훈이 공격에서만 강점을 보인 빅맨은 결코 아니다. 서장훈은 지난 23일 대구 오리온스전에서 정규리그 역대 통산 최다 리바운드를 달성했다. 통산 리바운드 3834개. 지난 몇 년간 리바운드 수치가 하락했지만 데뷔 해였던 1998-99시즌에는 평균 리바운드 부문 전체 1위(13.97개)에 올랐다. 토종 빅맨으로는 전무후무한 리바운드왕. 이외에도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더블-더블 시즌을 4차례나 기록했다. 그러나 수비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돋보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몸싸움에서는 뒤지지 않았지만 느린 스피드로 종종 백코트 복귀나 2대2 수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하지만 선수생활의 종반에 접어든 올 시즌, 서장훈은 그 어느 때보다 공수 양면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솔선수범의 플레이로 유종의 미를 노리고 있다. ▲ 수비형 빅맨 김주성 신인왕(2002-03), 정규리그 MVP(2003-04), 플레이오프 MVP(2004-05), ‘베스트5’ 4회 수상(2002~2006), 역대 프로농구 최고연봉(6억8000만 원) 등 프로 데뷔 후 김주성이 쌓아올린 경력은 화려하다. 그러나 김주성은 개인기록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돋보이지 않는다. 서장훈은 “기록은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개인기록뿐만 아니라 팀 성적도 포함된다. 김주성의 소속팀 원주 동부는 그가 입단한 2002-03시즌 이후에만 통합우승 1회를 비롯해 정규리그 우승 2회, 플레이오프 우승 2회, 4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놀라운 실적을 올렸다. 그 중심에 김주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화석처럼 단단한 사실이다. 김주성은 수비가 강점인 선수다. 서장훈이 한국농구 사상 최고의 공격형 빅맨이라면, 김주성은 한국농구 사상 최고의 수비형 빅맨이라 할 수 있다. 김주성은 1대1 수비는 물론 도움수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정규리그 통산 블록슛 568개로 이 부문 역대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데뷔 후 매년 블록슛 랭킹 5위 내에 이름을 올렸다. 2003-04시즌에는 외국인선수를 제치고 블록슛 부문에서 당당히 전체 1위(2.43개)에 올랐고, 올 시즌에도 이 부문에서 전체 1위(2.54개)를 달리고 있다. 수비에서도 자신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스피드와 탄력을 매경기 십분 활용하고 있다. 탄력을 앞세운 블록슛과 빠른 스피드가 바탕이 된 백코트 복귀 능력도 김주성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미덕이다. 김주성의 진정한 강점은 개인의 활약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인트가드는 나머지 팀원들의 능력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포지션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빅맨은 포인트가드 이상으로 팀원들의 능력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축이 될 수 있다. 김주성은 플레이가 결코 골밑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과거 빅맨들과 달리 김주성은 로포스트와 하이포스트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활발한 활동량으로 팀 공격의 윤활유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팀원들을 살피고 패스를 찔러주는 피딩 능력도 좋다. 보이지 않게 팀원들과 팀 전력 자체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김주성이다.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개인기록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이유. 물론 필요할 때에는 득점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갖췄다. 김주성의 발전된 중거리슛은 그가 공격력 강화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 영리한 빅맨 함지훈 지난 2월 1일 열린 2007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함지훈은 1라운드 전체 10순위로 울산 모비스에 지명받았다. 당초 함지훈은 김태술·이동준·양희종·김영환 등과 함께 드래프트 ‘빅5’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보다 한참 떨어지는 순위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시 함지훈에게 인색한 평가를 내린 쪽은 형편없는 운동능력을 이유로 들었다. 함지훈의 점프력과 탄력은 국내선수 중에서도 처지는 편이다. 순발력이나 스피드도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다. 운동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래도 성장에도 한계가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프로에서의 성장 가능성이 낮게 평가된 것이다. 하지만 함지훈은 농구가 운동능력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입증하고 있다. 함지훈은 농구를 쉽게 한다는 인상을 준다. 굳이 어렵게 플레이하지 않고 쉽게 플레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함지훈은 체격조건이나 운동능력에 의존하는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기본기와 타이밍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골밑에서 펼치는 현란하고도 안정된 피벗 플레이는 함지훈이 어떤 선수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상대선수의 수비방향을 역으로 이용하는 등 타이밍을 빼앗는 능력도 탁월하다. 간결하지만 위력적인 순간 페이크의 힘이다. 또한, 프로 입문 후 같은 포지션의 대선배 이창수로부터 전수받은 훅슛은 이제 양손으로 사용할 정도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서장훈처럼 슛 거리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에 충실한 플레이로 골밑을 지배하고 있다. 함지훈의 또 다른 강점은 영리함이다. 함지훈은 골밑을 지키는 센터지만, 농구를 알고 플레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상적으로 농구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많이 요구되는 포지션은 포인트가드다. 하지만 센터도 소위 말하는 ‘배스킷볼 IQ’가 요구되는 포지션이다. 팀의 중심이 되는 빅맨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농구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아야 한다. 함지훈은 농구를 제대로 알고 플레이하는 빅맨이다. 상대의 더블팀에 대처하는 능력은 도저히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하고 또 영리하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대처능력도 그만큼 뛰어나다. 볼을 갖는 시간이 많지 않으며 터프한 플레이를 펼치지도 않지만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경기당 평균 5.4개의 자유투를 얻을 정도로 영리함으로 상대를 괴롭히고 있다. ▲ 쇼타임 빅맨 이동준 이동준은 미지의 선수였다. 모두가 그를 궁금해했다. 해외에서는 가드로 뛰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가드로 쓰기에는 체격조건과 운동능력이 아까웠다. 스몰포워드로 활용될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슛거리가 짧고 슈팅력도 들쭉날쭉했다. 결국 이동준이 정착한 포지션은 파워포워드와 센터를 넘나드는 빅맨이었다. 시즌 초반에만 하더라도 더딘 적응세로 드래프트 전체 2순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이동준은 2라운드를 기점으로 조금씩 한국농구에 녹아들고 있다. 소속팀 대구 오리온스가 최하위로 처지며 어수선한 가운데 이뤄낸 적응이라 더욱 더 의미가 크다. 포인트가드 김승현이 복귀하고, 팀이 재정비된 이후부터는 이동준의 가파른 성장을 기대해도 좋을 전망이다. 이동준의 강점은 역시 운동능력이다. 귀화 혼혈선수로 운동능력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타고난 점프력과 신장 대비 스피드는 분명 이동준의 강점이다. 속공메이커 김승현이 곁에 있었더라면 이동준의 속공가담능력은 더욱 화려하게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운동능력을 앞세운 리바운드나 블록슛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외국인선수들의 전유물이 된 공격 리바운드 이후 풋백 득점은 이동준의 무기이기도 하다. 또 리그에서 5번째로 많은 경기당 평균 1.44개의 블록슛을 기록할 정도로 수비에서도 탄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이 붙고 있는 이동준은 이제 스스로 볼을 갖고 골밑으로 돌진할 정도로 주도적이다. 매경기 한 번씩은 터뜨리는 호쾌한 덩크슛도 화려함에 목말라있는 팬들에게 새로운 볼거리가 되고 있다. 기록상으로나 체감상으로나 빠른 적응속도를 보이고 있는 이동준은 나이가 27살로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성장 가능성의 한계를 쉽게 점칠 수 없다는 평이다. 실제로 이동준은 벌써부터 뛰어난 생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은 선수이기도 하다. 딱딱한 슛폼, 높은 수비자세, 부족한 완급조절, 낮은 한국농구 이해도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동준은 최근 7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38.8분이라는 신인에게는 일견 혹사에 가까운 출전시간을 소화하면서도 조금씩 한국농구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코트에서의 경험으로만 체득될 수 있는 완급 조절 및 세기 면에서도 점차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페이스만 잘 이어간다면 가까운 미래 이동준은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쇼타임 빅맨’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서장훈-김주성-이동준-함지훈(왼쪽부터 시계방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