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7’은 행운의 숫자를 상징한다. 한국농구가 낳은 전설적인 슈터 이충희(48) 감독은 지난 5월14일 대구 오리온스 제4대 감독으로 부임, 정확히 7년 만에 프로농구 사령탑으로 복귀했다. 지난 10월19일 프로농구 시즌 개막전에서는 공교롭게도 7년 7개월 만에 복귀전을 가졌다. 그러나 이 감독은 지난 26일 자진사퇴 형식으로 지휘봉을 놓았다. 부임 7개월 만의 사퇴였다.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극복하고 프로로 복귀했지만, 불과 7개월 만에 물러난 이 감독에게 7은 행운과 너무 거리가 먼 숫자였다. 오히려 불운이었다. 창원 LG 시절부터 선수 복이 없었던 이 감독은 오리온스에서마저 지지리도 선수 복이 따르지 않았다. ▲ 청사진은 펼치지도 못했다 LG 시절 이 감독은 강력하고 끈끈한 수비농구를 펼쳤다. 1997년 LG 초대감독으로 부임할 때부터 이 감독은 화려한 슈터로 명성을 떨친 선수시절과는 달리 수비농구의 청사진을 밝혔다. 그때 이 감독이 한 말이 바로 “공격은 타고나지만, 수비는 성실하면 된다”였다. 이 감독은 자신과 대조적으로 현역 시절 최고의 수비수로 활약한 정덕화 현 삼성생명 감독을 코치로 불러들이며 수비조직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실제로 LG 창단멤버는 양희승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공격과는 담을 쌓은 선수들이었다. 박재헌·박규현·박훈근·김태진·이상영·윤호영 등이 창단멤버였다. 양희승도 고질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첫 시즌에는 14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이 감독의 청사진은 의도대로 먹혀들었다. LG는 신생팀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창단 첫 해였던 1997-98시즌 당당히 정규리그 2위(27승18패)에 오르는 놀라운 파란을 일으켰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수비농구의 성공이었다. 당시 LG는 평균 득점 8위(89.9점)였으나 평균 실점(86.7실점) 및 스틸(11.4개)에서 2위에 오르는 등 끈끈한 수비로 대성공했다. ‘이충희표 수비농구’는 수비가 곧 공격이었다. 공격 대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었고, 이 감독은 처음부터 수비에 포커스를 맞추고 팀을 꾸렸다. 물론 팀 공격의 절반 이상을 책임진 ‘득점기계’ 버나드 블런트의 존재는 이충희표 수비농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오리온스에서는 LG 시절과 180도 다른 청사진을 밝혔다. 오리온스에 부임한 이 감독은 ‘때리고 부수는’ 화끈한 공격농구를 선언했다. LG 시절과 달리 오리온스에는 김승현·김병철·정재호·오용준 등 공격성향이 강한 선수들이 많았다. 귀화 혼혈선수 이동준도 수비보다는 공격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 김진 감독 시절부터 오리온스는 질풍처럼 달리고 거침없이 슛을 던지는 공격농구가 몸에 배어있었다. 이 감독으로서는 밑져도 본전이었던 신생팀 LG 시절과 달리 6시즌 연속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오리온스에서 기존의 성적에다 인기까지 유지해야 하는 막중한 부담까지 안고 있었다. 결국 이 감독은 김승현을 중심으로 한 공격농구로 새로운 오리온스 농구를 예고했다.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드래프트에서 빅맨과 가드로 외국인선수를 구성하며 차별화된 공격농구를 펼칠 요량이었다. 그러나 시즌 전부터 악재가 겹쳤다.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뽑은 마크 샌포드가 훈련 중 무릎 부상으로 퇴출된 데 이어 가드 코리 벤자민마저 훈련 중 같은 부상으로 퇴출되고 말았다. 두 선수 모두 NBA 출신으로 빠른 스피드를 앞세운 공격농구를 염두에 두고 뽑았으나 부상 악재로 물거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승현마저 울산 모비스와의 공식 개막전을 끝으로 고질적인 허리디스크로 쓰러졌다. 모든 것이 청사진과 빗나갔다. 이 감독은 시즌 전과 초반에만 하더라도 차별화된 농구를 펼치겠다는 의지가 남달랐다. 시즌 전 “장외에서 본 오리온스는 선수들의 끈기가 부족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부족해 보였다. 선수들한테 그런 쪽으로 강조했다”고 밝힌 이 감독은 시즌 초반 “지난 시즌까지 오리온스는 속공에서도 외곽슛으로 승부하는 경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확률 높은 골밑을 먼저 공격하는 정석적인 농구를 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시즌 초반 오리온스는 외곽슛보다 확률 높은 골밑 공격으로 개막 2연승을 달렸다. 트리밍햄과 이동준 그리고 주태수까지 트리플 포스트를 심심찮게 가동, 오리온스답지 않은 높이의 농구를 보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의 청사진 실현은 없었다. ▲ 부상은 눈을 어둡게 한다 이충희 감독은 오리온스에 부임할 때 계약기간을 3년이나 보장받았다. 연봉은 3억 원으로 3억3000만 원을 받는 모비스 유재학 감독, SK 김진 감독 다음으로 높았다. 7년 만에 프로로 복귀한 감독에게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만큼 오리온스에서 이 감독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그러나 외국인선수들의 계속된 부상에 따른 교체와 김승현의 장기결장은 이 감독의 눈을 어둡게 하고 시야를 흐리게 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부상이라는 악령은 7년 만에 프로로 돌아와 당장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전설적인 스타 출신 감독에게는 상상 이상의 악재로 작용했다. 외국인선수들의 계속된 부상과 김승현의 장기결장은 시즌 전 오리온스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부상을 이유로 시즌 전부터 외국인선수 2명을 모두 교체하는 악운을 겪은 오리온스는 그러나 이후에도 로버트 브래넌, 칼튼 아론, 리온 트리밍햄 등 외국인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했다. 부상을 이유로 외국인선수를 4번이나 교체한 것은 올 시즌 오리온스가 처음이었다. 시즌 초반 이 감독은 “외국인선수를 교체한 지 얼마되지 않아 손발이 맞지 않는다. 경기를 하면서 점점 나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골밑을 지킬 외국인선수들이 차례로 부상으로 쓰러지자 대책이 서지 않았다. “외국인선수와 국내선수들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는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잦은 외국인선수 교체로 기존 선수들과 호흡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고, 이는 곧 조직력의 약화로 번졌다. 이음새가 느슨해진 공격농구는 효율성 제로의 단발성 농구로 변질됐다. 이 감독의 눈을 흐리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김승현의 부상이다. 지난 시즌 오리온스는 김승현이 도하 아시안게임 차출 및 부상으로 결장한 18경기에서 9승9패를 거두며 5할 승률로 선전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 오리온스는 김승현의 팀이라기보다는 피트 마이클의 팀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마이클의 가공할 만한 득점력은 김승현의 공백을 상당 부분 메울 수 있는 요인이었다. 그런 지난 시즌과 달리 올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리온스는 ‘김승현의 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김승현이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지자 오리온스는 졸지에 길잡이 없이 초행길을 찾는 여행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감독은 “(김)승현의 공백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선수들이 (김)승현이가 만들어주는 오픈 찬스에서 슛을 쏘는 스타일이었는데 직접 찬스를 만들어서 하려다보니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김승현이라는 존재가 없다보니 이 감독으로서는 베테랑 선수들과 검증된 선수들에 대한 의존도가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LG 시절에도 이 감독은 몇몇 특정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깊은 농구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오리온스에서는 예기치 못한 부상 악재가 불러온 악순환이었다. 결과적으로 김승현의 부재는 주축 선수들에 대한 혹사로 이어졌다. 김병철은 3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 4번째로 많은 경기당 35.8분의 출전시간을 소화했다. 오리온스는 선수교체도 경기당 평균 10.9회도 리그 최하위였다. 성적이 좋지 못한 팀에서 선수교체가 적었다는 것은 그만큼 벤치가 변화에 소극적이고 무방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타깝게도 이 감독이 그랬다. 부상은 54경기라는 빡빡한 일정을 치르는 프로농구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감독은 부상이라는 악재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 부상에 대처하는 것도 분명 감독의 능력이다. 26경기 4승22패, 승률 1할5푼4리. 최근 18경기에서만 11연패 포함해 1승17패를 당하는 등 10개 구단 중 압도적인 최하위라는 성적은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하는 프로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감독은 오리온스에서 마지막 승리가 된 지난 9일 부산 KTF와의 홈경기 후 “(김)승현이가 하루빨리 복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승현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 감독은 끝내 물러나고 말았다. 국내 지도자로서는 최단기간 퇴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 감독의 불운이 유독 아쉬운 것은 이처럼 불운의 도가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