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드래곤즈의 박항서 감독(49)은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롤 모델로 거스 히딩크 러시아대표팀 감독을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직도 박 감독은 히딩크와 함께 했던 옛 추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광양의 전남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던 박 감독은 히딩크와 터키 안탈리아서 조우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히며 각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감독실 책상에는 박 감독이 아끼는 낡은 수첩 몇 권이 놓여있다. 박 감독의 보물 1호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박 감독은 정해성 현 대표팀 수석코치와 함께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한국 대표팀을 2002 한일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다. 당시 반짝거리는 박 감독 머리에 히딩크 감독이 입을 맞추는 사진은 여전히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곤 한다. 박 감독은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보물처럼 아끼는 이 수첩들을 펼쳐든다. 히딩크의 노하우가 그대로 담겨있다. 효율적인 훈련법, 선수 관리, 경기 유형별 대처법, 하다못해 식사할 때 수칙까지 적혀있다. 김문형 전남 홍보팀 직원은 “박항서 감독은 틈만 나면 히딩크 시절을 되새기곤 한다”면서 “종종 월드컵 4강 신화의 초석이 됐던 일화를 얘기하는데 히딩크의 선수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을 매우 부러워하더라”고 설명했다. 확실히 히딩크는 심리전의 대가였다. 김 씨가 언급한 일화 하나.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제주 서귀포로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 히딩크가 선수단 전체에게 오픈카 탑승 기회와 함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휴식일을 지정했다. 물론 국내 코칭스태프들은 반대했고, 히딩크는 “한 번 두고보자”고 말하며 일정을 강행했단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천수만 오픈카를 시승하고 왔을 뿐,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은 숙소에 남아 마인드 컨트롤과 개인 트레이닝을 했단다. 선수 심리를 역이용한 셈이다. 최종 엔트리 발표를 앞두고 히딩크는 이동국, 차두리 등 3명 정도를 마지막 선발 대상으로 꼽은 뒤 코치진의 의향을 물었다. 히딩크는 다른 이들과 달리 차두리를 지목했다. “경기 분위기를 단숨에 뒤바꿀 수 있다”는 게 이유. 이 선택이 적중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박 감독이 히딩크를 부러워하는 점은 비단 이뿐만 아니다. ‘정치적 면모와 뛰어난 사회성’도 박 감독은 히딩크를 닮고 싶어한다. 인터뷰 때 박 감독은 “히딩크는 못하는 게 없다. 내가 경남 감독을 하며 모자라다고 느꼈던 부분을 히딩크는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고 했다. 비록 담담한 어조였지만 박 감독의 눈빛과 표정에는 히딩크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헤어진 지 수 년이 흘렀어도 종종 안부 메시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나누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박 감독이 경남을 맡았을 때, 전남으로 옮겼을 때 가장 먼저 히딩크에게 알렸다. 안탈리아로 23일 출국한 박 감독은 다음달 초 히딩크와 모처럼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 우연찮게 그 시기에 맞춰 히딩크가 러시아대표팀을 이끌고 터키로 전훈을 오는 탓이다. 박 감독은 히딩크에게 전남 선수단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성사 가능성이 높다. “시간을 아껴써라” “선수를 만들어가며 쓰지 말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원(선수단)에 만족하고 충실하라”. 히딩크가 전남으로 옮겨가는 박 감독에게 전달한 이메일 내용이다. 고독한 직책인 사령탑 직책을 수행하며 박 감독이 외롭다고 느끼지 않는 이유다. yoshike3@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