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25% 확률게임. 추첨기계에서 하얀색 구슬이 등장하는 순간 전주 KCC는 환호했다. 6년 전 원주 TG삼보 플레잉코치로 있었던 허재 감독은 그 해 김주성이 참가한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자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만세를 불렀다. 그 때도 구슬은 하얀색이었다. 이번에도 그 때 그 하얀색 구슬이 허 감독에게 행운의 상징이 됐다. 허 감독의 입은 귀에까지 걸렸고, KCC는 만세를 불렀다. 전체 1순위 지명권으로 KCC는 한국 농구 사상 최장신인 ‘초특급 폭풍’ 하승진(23·221.6cm)을 지명했다. 허 감독은 “김주성을 지명했을 때보다 더 기쁘다”고 말했다. 기존 서장훈에 하승진까지 가세한 KCC는 이제 한국판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꿈꾸게 됐다. ▲ 1순위 지명권 얻기까지 KCC가 1순위 지명권을 얻기까지는 숱한 곡절이 있었다. 200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따냈던 KCC는 그러나 이미 울산 모비스에게 지명권을 양도한 상태였다. 외국인 센터 R.F. 바셋을 우승청부사로 데려오며, 드래프트 지명권을 내준 상태였다. KCC는 그 해 챔피언결정전에서 TG삼보를 4승3패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만 세대교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KCC가 넘긴 1순위 지명권으로 모비스가 지명한 선수는 양동근이었다. 양동근이 정규리그 MVP 2연패를 달성하며 날아다니는 동안 KCC는 조성원이 은퇴하고 이상민이 노쇠화에 접어들고 있었다. 결국 KCC는 지난 시즌 세대교체 실패와 함께 부상 악재까지 겹치며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15승39패, 승률 2할7푼8리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전신인 현대 시절까지 포함해 구단 사상 첫 최하위라는 대수모를 당했다. 역대 프로농구 최하위 가운데 4번째로 나쁜 승률이라는 불명예도 뒤집어썼다. 사령탑 2년차를 맞아 혹독한 나날을 보내던 허재 감독의 머리에는 어느덧 흰머리가 수북하게 자라나 있었다. KCC에게 비상구란 보이지 않았다. 황금어장이었던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미래는 더욱 암울해져 보였다. 김민수·윤호영·강병현 등이 등장할 올 드래프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KCC는 의외로 빨리 승부수를 던졌다. FA 시장에서 서장훈과 임재현을 동시 영입하며 어깨가 처진 허재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한 번에 대어급 FA 2명을 영입하려다 탈을 일으키고 말았다. 지난 시즌 연봉이 20위권이었던 서장훈을 받아 전 소속팀 서울 삼성에 보상선수를 내주어야했고, 보호선수로는 서장훈을 포함해 3명만 지정할 수 있었다. 서장훈을 비롯해 추승균과 임재현을 보호선수로 묶은 KCC는 불가피하게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민을 제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상민을 보상선수로 지명하겠다고 나선 삼성은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이상민을 지명하지 않는 조건으로 KCC에 신인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요구했다. KCC는 장고 끝에 결국 이상민을 보내고, 드래프트 상위지명권을 지켰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KCC는 세대교체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승진은 한국으로 유턴하지 않은 상태였다. 김민수·윤호영·강병현·차재영 등 특급 유망주들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아시아선수권대회 이후 하승진의 국내 복귀설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하승진은 지난해 10월 국내 유턴과 함께 드래프트 참가를 공식 선언했다. 상위 지명권의 값어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순간이었다. KCC는 이상민의 이적이라는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지명권을 지켰고, 결국에는 그 득을 봤다. ▲ 한국판 샌안토니오 KCC의 하승진 지명은 마치 NBA 샌안토니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드래프트 지명권을 얻기까지 과정에서 샌안토니오는 KCC처럼 요란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전통의 강호로 승승장구하다 딱 한 시즌을 망치고 얻은 전체 1순위 지명권으로 초대어 선수를 낚은 것은 흡사하다. 게다가 지명선수가 모두 센터라는 점이 그렇다. 샌안토니오는 팀 덩컨, KCC는 하승진이다. 심지어 샌안토니오와 KCC가 이미 특급센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샌안토니오에는 데이빗 로빈슨이 있었고 KCC에는 서장훈이 있다. 샌안토니오가 당대 최고의 트윈타워를 형성한 것처럼 다음 시즌부터 KCC도 사상 최고의 트윈타워를 형성할 것이다. 샌안토니오 왕조의 시작은 로빈슨이었다. 1987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샌안토니오에 지명받고 2년간 해군 복무를 마친 후 1989-90시즌부터 데뷔하자마자 신인왕을 차지하고 1994-95시즌에는 MVP에도 올라 샌안토니오를 서부의 대표적인 강팀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1996-97시즌 로빈슨은 허리 부상으로 6경기밖에 뛰지 못했고 샌안토니오는 20승62패라는 프랜차이즈 사상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29개 팀 중 27위밖에 되지 않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1997년 드래프트에는 1992년 샤킬 오닐 이후 최고의 빅맨이라는 웨이크 포리스트대학 출신 덩컨이 기다리고 있었다. 1순위 확률은 36.0%로 보스턴 셀틱스가 가장 높았다. 하지만 막상 드래프트날 행운의 여신은 샌안토니오를 향해 웃었다. 샌안토니오는 보스턴·밴쿠버 다음의 확률을 갖고 있었으나 놀랍게도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쥐었고 주저없이 덩컨을 지명했다. 샌안토니오는 로빈슨-던컨 트윈타워를 앞세워 1998-99시즌 구단 창단 첫 우승을 일궈냈고 2002-03시즌에도 트윈타워의 활약에 힘입어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로빈슨은 우승과 함께 ‘아름다운 은퇴’를 택했다. 샌안토니오는 로빈슨이 은퇴한 뒤에도 무려 두 번이나 더 우승했다. 특히 덩컨이 입단한 이래 10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있다. 덩컨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 시즌을 망친 대가치곤 너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KCC도 2002-03시즌 9위로 추락한 적은 있었지만 줄곧 프로농구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지난 시즌 세대교체와 함께 각종 불운이 겹쳤지만 올 시즌을 앞두고 서장훈을 영입해 예의 강호로 되돌아간 상태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하승진이라는 초대어를 영입해 프로농구 사상 최고의 토종 트윈타워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 어느 팀보다도 1순위 지명권을 원했던 인천 전자랜드는 마치 1997년 보스턴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KCC는 샌안토니오처럼 단 한 시즌을 망친 대가치곤 너무나도 큰 하승진이라는 행운을 얻었다. NBA와 달리 국내에서는 하승진을 견제할 만한 선수가 없다는 점에서 ‘하승진 효과’는 ‘덩컨 효과’ 이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 KCC의 의무와 과제 하승진을 지명한 직후 허재 감독은 “지금은 아무런 고민없이 그냥 너무 기쁘다”고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허 감독은 “높이가 있는 선수들이 있으니 너무나도 큰 기쁨이다. 이제 외국인선수를 어떻게 뽑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하승진을 뽑았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승진을 잡으면 천하를 호령할 것이라는 부푼 기대는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부담이라는 이름으로 바뀔지 모른다. 하승진이라는 국보급 선수를 지명한 KCC는 그가 다시 NBA에 진출할 수 있을 만큼 잘 키워야 할 의무가 있다. 허재 감독에게도 무거운 숙제가 주어진 셈이다. KCC는 당장 다음 시즌 주전 라인업을 짜기가 쉽지 않아졌다. 임재현-추승균-서장훈-하승진이라는 막강한 토종 라인업을 구성함으로써 외국인선수를 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허재 감독으로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그만큼 라인업의 조정을 통해 코트밸런스를 효율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과제가 될 전망이다. 외국인선수를 뽑는 데 있어서도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서장훈-하승진의 공존도 마찬가지 문제다. 두 선수 모두 신장은 크지만 스피드가 떨어지고 움직임이 적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상대팀으로부터 역습을 당할 우려가 없지 않다. KCC는 다음 시즌 나머지 9개 구단들의 표적이 될 것이 자명하다. KCC 구단 입장에서도 고민이 커진다. 다음 시즌에는 신인선수 연봉 상한선인 1억 원으로 하승진의 연봉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하승진이 데뷔 첫 해부터 가공할 만한 임팩트를 과시할 경우에는 연봉이 대폭적으로 뛰어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장훈·추승균·임재현이라는 고액 연봉자들이 있는 KCC로서는 샐러리캡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진다. 안 그래도 가드진이 약한 KCC로서는 가드를 영입할 여력도 없어진다. 하지만 이 모든 고민들을 한 번에 뒤엎을 수 있을 정도로 ‘하승진 효과’가 클 것으로 KCC는 기대하고 있다. 특히 2009-10시즌부터는 외국인선수가 ‘2명 보유 및 1명 출전’으로 바뀌기 때문에 하승진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다. NBA 재진입을 잠정 포기하고 국내로 돌아온 하승진도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하승진은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선수가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출전기회를 가지며 더 큰 무대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승진은 그동안 충분한 출전시간을 얻지 못했다. 매번 경기 감각이 떨어져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아시아수권대회에서 출전 시간이 보장되고, 자신을 중심으로 팀이 돌아갈 경우 얼마나 무서운 선수가 될 수 있는지 입증한 바 있다. KCC에서는 보다 철저하게 관리를 받으며 성장할 것이다. 하승진은 “농구를 하며 존경의 대상이었던 서장훈 선배와 뛰게 돼 너무 기쁘다. 서장훈 선배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며 트윈타워를 형성하게 될 서장훈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서장훈은 하승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그만큼 많은 견제를 받으며 자랐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겪은 서장훈의 가르침은 하승진에게 곧 피와 살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