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서울 SK ‘람보슈터’ 문경은(37·190cm)은 여느 프로선수들처럼 자존심이 강한 선수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슈터였던 만큼 자존심은 당연한 가치였다. 프로무대에서 유일한 우승 순간이었던 2000-01시즌 수원 삼성 시절에도 문경은은 웃지 못했다. 팀의 에이스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경은도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는 베테랑이 됐다. 그에게 자존심이라는 가치는 예전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하지만 문경은 특유의 배포가 죽은 건 아니다. 문경은은 리그 최고의 식스맨으로 재탄생하며 건재를 알리고 있다. 최고의 식스맨 최근 프로농구의 특징은 주전과 후보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외국인선수 1명 출전제한 쿼터가 2~3쿼터로 늘어난 지난 시즌부터 이같은 추세가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팀들이 특정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6라운드 54경기를 치르는 데 있어 애로사항을 호소한다. 벤치멤버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식스맨의 활약이 절실한 이유다. 주전들의 체력 부담을 덜어주고 종종 조커로서 분위기 전환 역할도 해내야 한다. 매년 우승팀에는 특급 식스맨들이 있었다. 식스맨의 중요성은 이제 농구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올 시즌 프로농구에서 가장 돋보이는 식스맨은 놀랍게도 베테랑 문경은이다. 문경은은 올 시즌 36경기에 출장해 경기당 20.1분을 뛰고 있다. 데뷔 후 가장 적은 출전시간이다. 하지만 순도는 어느 때보다도 높다. 평균 11.7점을 올리고 있다. 40분으로 환산하면 평균 20점에 육박하는 득점력이다. 3점슛도 평균 2.17개로 전체 4위에 올라있고, 3점슛 성공률도 40.7%로 전체 11위에 랭크돼 있다. 자유투도 106개를 얻어냈고, 그 중 94개를 성공시켰다. 자유투 성공률 88.7%로 이 부문에서도 역시 전체 3위. 문경은의 슛은 아직 죽지 않았다. 문경은이 돋보이는 점은 식스맨으로 출전했을 때 진가를 보였다는 점이다. 올 시즌 36경기 중 문경은이 주전으로 뛴 경기는 4게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32경기는 벤치에 앉아 있다 출전했다. 하지만 무려 21경기에서 팀 내 최다 벤치득점을 기록했다. 리그 전체서 이 부문 1위다. 게다가 15점 이상 고득점 무려 10경기에서나 기록했다. 짧은 시간에도 특유의 폭발력은 변함없었다. 방성윤이 부상으로 결장한 이후에는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김진 감독은 승부처에서 여지없이 문경은을 투입해 분위기 반전을 노린다. 김진 감독은 “(문)경은이가 위기에서 노련미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팀의 강점이고, 그런 쪽을 계속해 살릴 것”이라고 말한다. 문경은의 이 같은 활약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농구공을 잡은 후 사실상 처음으로 벤치멤버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문경은은 지난 시즌에도 47경기 가운데 25경기에서 주전으로 뛰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부터 벤치멤버로 밀렸고, 문경은은 달라진 입지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데뷔 후 가장 적은 평균 10.9점에 그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 시즌에는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어진 임무를 최대한으로 즐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길 정도다. 다득점과 에이스 역할에만 매몰된 문경은은 없다. 문경은 본인도 “코트에서 뛰는 시간이 적지만 적은 만큼 조미료 역할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한다”며 식스맨의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다. 노장의 진면목 문경은은 1971년생으로 우리나이로는 38살이다. 문경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선수는 1969년생 이창수(모비스)가 유일하다. 문경은은 프로농구 전체 서열 2번째 고참이다. SK에서는 단연 최고참이다. SK 구단은 문경은에게 플레잉코치 보직을 맡겼다. 문경은이 보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다. 지난해 FA가 된 후 2년간 연봉 2억 원이라는 전성기에 비하면 초라한 계약조건에 울며 겨자먹기로 도장을 찍었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 고액연봉으로 FA 계약을 체결한 선수는 어디에도 없다. 문경은은 올 시즌 코트에서 기량과 실력으로 몸값을 다해내고 있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밖에 없다. 올 시즌을 앞두고 문경은은 더욱 몸 관리에 힘을 기울였다. 신체 나이가 노쇠한 베테랑 선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문경은은 지금도 매일 하체훈련을 꼬박 한 시간 넘게 하고 있다. 슛 밸런스를 잘 유지해야 하는 슈터의 힘은 탄탄한 하체에서 비롯되며 하체를 뒷받침하는 근육은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경기 2개 이상의 3점슛을 성공률 40%대로 성공시키는 비결이다. 문경은의 3점슛은 여전히 승부처에서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공격 옵션이다. 문경은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언의 클러치 메시지는 코트 위 선수들에게 시시각각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문경은의 진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난다. 과거 문경은은 수비가 약한 반쪽짜리 선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공격에 집중하던 전성기 때는 수비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올 시즌에는 다르다. 수비에서도 구멍이 되지 않기 위해 한 발씩 뛰어도 될 것을 두 발씩 뛰고 있고 몸도 사리지 않는다. “문경은하면 공격 선수지만, 수비에서 될 수 있으면 피해가 안 가도록 한 발씩이라도 더 뛰려고 한다”는 것이 문경은의 말이다. 후배 방성윤을 바라보며 “최소한 10년만 더 젊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는 문경은이지만 그는 이제 확실하게 변했다. 어느덧 문경은은 프로농구 11년차가 됐다. 역대 프로농구에서 11시즌을 뛴 선수는 지난해 은퇴한 김영만을 비롯해 이상민(삼성)·추승균(KCC)·전희철(SK)·주희정(KT&G)·양희승(KTF)밖에 없다. 11시즌을 주득점원 겸 슈터로 활약한 만큼 기록도 많이 쌓였다. 통산 득점이 서장훈(KCC·9617점) 다음으로 많은 8718점이다. 트레이드마크인 3점슛은 1549개로 압도적인 1위에 올라있다. 2위는 양경민으로 1005개. 문경은 3점슛에 있어 프로농구의 전설로 남을 것이 유력하다. 문경은은 3점슛 타이틀만 4차례나 차지한 슈터 중의 슈터다. 11년차를 맞아 식스맨이라는 생소한 보직에서 새로운 성공시대를 열고 있는 문경은. 그의 올 시즌 목표는 꾸밈없다. “팀이 6강 플레이오프에 올라가 우승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는 식스맨상이라는 것을 한 번 받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문경은이 솔직한 마음이다. 노장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문경은이 과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지 농구팬들의 이목이 다시 한 번 그의 손끝에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