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야구 대명사' 이광환, 현장 복귀 결과는?
OSEN 기자
발행 2008.02.05 10: 40

[OSEN=이상학 객원기자] 자율야구의 대명사가 돌아왔다. 이광환(60) 감독이 ‘제8구단’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지난 2003년 ‘선동렬 후폭풍’을 맞고 LG 지휘봉을 놓아야했던 이 감독에게 환갑의 나이에 다시 한 번 기회가 온 것이다. ‘메이저리그식 단장제’를 표방하고 있는 박노준 단장은 코드가 가장 잘맞는 감독으로 이 감독을 낙점했다. 이 감독도 박 단장에 앞서 메이저리그 연수를 다녀와 그 누구보다 ‘메이저리그식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지난 2006년 환갑의 나이에 현장에 복귀한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3번째 우승에 실패했지만 환갑이 넘은 나이에 최고령 감독으로 돌아온 김성근 SK 감독은 성공했다. 과연 이광환 감독은 어떻게 될까. ▲ 이광환이즘 메이저리그 현역 통산 최다승(2375승)을 자랑하는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감독은 일종의 혁명가였다. 라루사 감독은 이른바 ‘라루사이즘(LaRussaism)’으로 일컬어지는 투수 분업 시스템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정착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1이닝 마무리를 위시한 불펜 분업화는 1920년 '몸에 맞는 볼' 도입과 1960년대 마운드 높이 조정 이후 최고의 혁명으로 통한다.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1이닝 마무리를 위시한 불펜 분업화 시스템은 고착화됐다. 메이저리그의 흐름은 곧 세계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는 그렇지 않았다. 이광환이 지휘봉을 잡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광환 감독은 1986년 일본 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 1987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그리고 1989년 OB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성적이 별로였다. 부임 첫 해 54승3무65패, 승률 4할6푼3리로 7개 구단 중 5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 1990년에는 시즌 중 퇴진했다. 퇴진 당시 성적은 15승1무30패. 그해 OB는 최하위로 추락했다. ‘자율야구’라는 거창한 포부는 탁상공론으로 평가절하됐다. 공교롭게도 이광환 감독 재임 시절 가장 빛을 본 선수는 타자로 전업한 박노준이었다. 1989년 박노준은 팀 내 최고 타율(0.298)을 기록했다. 이 감독과 박노준은 고려대 선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감독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가 왔다. 1991년을 끝으로 감독자리가 공석이 된 LG는 이 감독에게 추파를 던졌다. 실패한 자율야구에 대한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이 감독은 LG에서 충분한 시간과 권한을 보장받았다. 이광은·김재박·김상훈·윤덕규와 같은 팀 내 간판스타들이 이 감독 때 정리됐다. 1992년 부임 첫 해에는 53승3무70패, 승률 4할3푼3리로 7위에 그쳤다. 하지만 ‘야생마’ 이상훈이 입단한 1993년 66승3무57패로 페넌트레이스 4위를 차지하고 포스트시즌에도 올랐다. 이 감독은 정삼흠-김태원-김기범-이상훈-차명석의 5인 선발 로테이션과 차동철·김용수를 중심으로 불펜 분업화가 바탕이 된 ‘스타시스템’으로 선수단을 차차 변화시키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의 라루사이즘이라면, 한국의 이광환이즘이었다. 1994년은 LG와 이광환 감독에게 영광으로 기억될 역사적인 한 해였다. 1994년 LG는 81승45패, 승률 6할4푼3리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라 한국시리즈에서도 태평양을 상대로 4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신인 3인방’ 유지현·김재현·서용빈이 떴고, 이상훈과 김용수는 각각 최고의 선발·마무리투수로 활약했다. 특히 마무리 김용수는 철저하게 1이닝으로 기용됐다. 김용수가 63⅓이닝을 던질 때 40세이브를 거둔 정명원은 105⅔이닝, 구대성은 한술 더 떠 121이닝을 던졌다. 김용수는 불혹의 나이까지 던지고 은퇴했다. 이 감독의 ‘스타시스템’은 이제 상식이다. 하지만 첫 시도를 이 감독이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 감독을 혁명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 자율의 시대를 넘어 1990년대 이광환 감독의 LG는 말 그대로 신바람나는 야구를 했다. LG의 최고 전성기도 바로 이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시절이었다. 이 감독은 선수들에게 선택을 맡기는 빅볼로 신인 3인방을 키워냈고, 마운드 분업화 시스템으로 혁명을 몰고 왔으며, 별도의 전력분석 시스템까지 도입해 한 발짝 앞서가는 선진야구를 펼쳤다. 프런트와 호흡도 척척 잘 맞아떨어졌다. 당시 이 감독은 권위주의 시대에서 탈피, 양보와 협력으로 LG 야구를 만들었다. 이광환 감독의 LG는 현장과 프런트의 조화가 가장 잘 이루어진 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1994년이 이 감독과 LG에게는 정점이었다. 1996년 이 감독은 LG에서 중도 퇴진했다. 2001년 한화 감독으로 복귀해 첫 해부터 페넌트레이스 4위로 팀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았지만, 당시 한화의 성적은 5할도 되지 않는 4할7푼3리(61승4무68패)였다. 하지만 그해 한화가 창단 후 가장 빠르고 역동적인 야구를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2002년 59승5무69패, 승률 4할6푼1리로 7위에 그치며 다시 지휘봉을 놓았다. 이 감독은 곧바로 LG로 갔지만 성적은 60승2무71패, 승률 4할5푼8리로 전체 6위밖에 되지 않았다. 시즌 후 이 감독은 ‘선동렬 후폭풍’을 맞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감독은 취임일성으로 “5회까지는 번트를 대지 않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감독은 희생번트를 회피한 감독이었다. 대신 선수들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배려하고 믿어줬다. 소소한 작전으로 하나하나 관리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선수들에게 맡기는 야구를 펼쳤다. 그래서 자율야구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이광환식 자율야구에는 선수들이 주체가 되는 만큼 선수구성과 전력이 중요했다. 이 감독이 OB에서 실패하고, LG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력의 차이가 컸다. 1980년대 말 OB의 전력은 말이 아니었지만, 1990년대 초중반 LG는 슈퍼신인들의 가세로 막강한 전력을 구축한 팀이었다. 센테니얼에서 성공 여부도 팀 전력에 따라 갈릴 공산이 크다. 한국시리즈 우승 4회의 전통을 자랑하는 현대는 지난해 6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전력을 떠나 박노준 단장과의 궁합은 긍정적이다. 센테니얼에게는 성적뿐만 아니라 시스템 개혁이라는 점도 중요한 성공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프런트와의 양보 및 협력에 누구보다 관대하다. 박 단장도 스승인 이 감독과 함께 하는 것이 메이저리그식 단장으로 하루빨리 뿌리 내릴 수 있는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 단장은 측면에서 원활한 선수수급으로 이 감독을 지원하고 이 감독은 그 선수들을 바탕으로 ‘단장의 야구’이자 ‘선수의 야구’를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권위주의 시대를 넘어 자율의 시대도 이제는 지나고 있다. 원활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서 과연 이 감독이 어떤 혁명을 일으킬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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