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환-채상병, 트레이드 '모범사례'
OSEN 기자
발행 2008.02.11 14: 51

[OSEN=이상학 객원기자] 트레이드의 손익 계산은 예단하기 어렵다. 당장 손해를 본 것 같아도 이득을 볼 날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2003년 12월 단행된 문동환(36)-채상병(29) 맞트레이드가 가장 대표적이다. 당시 FA 정수근이 롯데로 이적한 두산은 보상선수로 투수 문동환을 택했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한화 포수 채상병과 다시 맞바꿨다. 트레이드 당시만 하더라도 양 팀 모두 확신할 수 없는 트레이드였다.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으로 재활의 후유증이 남은 문동환은 재기를 확신할 수 없는 한물 간 투수였고, 채상병은 그저 그런 유망주였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예상 외의 결과를 낳으며 스펙터클하게 진행됐다. 손익 자체를 떠나 문동환-채상병 트레이드는 모범사례로 등재될 만하다. ▲ 문동환의 성공 이적 첫 해였던 2004년 문동환은 단숨에 선발 로테이션 자리를 꿰찼다. 유승안 감독은 문동환을 신뢰했다. 당시 한화의 선발 로테이션에서 확실하게 믿음을 준 투수는 ‘38살 노장’ 송진우밖에 없었다. 시즌 개막 후 뜨기 시작한 고졸신인 송창식이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할 정도로 한화 선발진은 허약했다. 한 시즌 17승을 거둔 검증된 베테랑 투수지만 무려 3차례의 수술과 재활로 누더기가 된 문동환의 팔꿈치는 당시 32살이라는 나이를 고려할 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승안 감독은 ‘슬로’를 강조하며 문동환에게 넉넉히 기회를 주었다. 문동환은 21차례 선발등판에서 무려 15패를 당했다. 리그 최다패였으며 방어율도 5.37이었다. 문동환의 2004년 활약은 모두가 우려한 모습 그대로였다. 유 감독은 2004년을 끝으로 지휘봉을 놓았다. 같은 해 채상병도 ‘스타포수’ 홍성흔에 가려 1군에서 겨우 15경기를 출장하는 데 그쳤다. 그 해 홍성흔은 생애 두 번째로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할 정도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시점이었다. 수비형 포수로 주가를 높이던 베테랑 백업포수 강인권의 벽도 생각보다 높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채상병은 시즌 말 병역비리에까지 연루됐다. 누가 보더라도 양 팀 모두에 이익이 되지 않는 의미없는 트레이드처럼 보였다. 트레이드의 발단이 된 정수근마저 롯데에서 기대 이하로 미미한 활약을 펼쳐 ‘마이너스의 삼각이동’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2005년부터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주인공은 공익근무로 공백기를 가진 채상병이 아니라 문동환이었다. 2004년의 시행착오가 힘겨운 재기의 늪을 지나고 있던 문동환에게 결과적으로 약이 됐다. 2005년 문동환은 26경기에서 173⅔이닝을 던지며 10승9패 방어율 3.47을 기록, 과거의 명성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5시즌 만에 거둔 두 자릿수 승리는 곧 감동의 재기 스토리로 이어졌다. 2006년은 감동을 넘어 잭팟이었다. 31경기에 선발등판해 무려 189이닝을 소화하며 16승9패 방어율 3.05으로 맹활약한 것이다. 괴물신인 류현진과 함께 막강 ‘토종 원투펀치’를 형성하며 한화 선발진을 굳건하게 이끌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문동환은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선발과 중간을 넘나드는 스윙맨으로 활약하며 한화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05년부터 한화가 본격적인 강팀 반열에 올라선 데에는 매년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꾸준하게 이닝을 먹어주며 효율적인 피칭을 한 문동환이라는 특급선발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이 트레이드의 성패는 이미 결정났는지 모른다. 문동환의 활약은 그만큼 대단했다. 이렇다 할 출혈없이 데려온 보험용 문동환의 활약은 한화에게 로또나 다름없었다. 비록 2007년 부상으로 시즌의 반을 날려먹고 포스트시즌에서도 부진했지만 그 누구도 문동환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이미 그도 한화의 전설들만큼 인정받는 베테랑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다. ▲ 채상병의 반전 채상병이 입단 1년 만에 야구 외적인 문제로 전력에서 이탈한 2년간 문동환은 무려 362⅔이닝을 소화하며 26승을 쓸어담았다. 이때까지는 두산의 잔인한 완패였다. 물론 2005~2006년 2년간 두산의 문제는 마운드가 아니라 타격이었다. 두산은 문동환이 없어도 매우 탄탄한 마운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좋은 투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두산에게 중복 투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물론 10승짜리 토종투수가 있다면 외국인 타자를 고용할 수 있겠지만, 잠실구장에서 외국인 타자가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김경문 감독은 문동환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진 트레이드 성패를 따질 때마다 “길게 내다보자”며 여유를 잃지 않았다. 김 감독의 예견대로 2007년 또 반전이 일어났다. 5월초 공익근무를 마치고 소집해제된 채상병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5월 중순 초고속으로 1군에 진입한 채상병은 주전포수 홍성흔의 부상을 틈타 1군 무대에서 포수 마스크를 섰다. 채상병이 1군에 올라온 시점부터 두산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채상병은 2년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노련한 인사이드워크와 수비력을 앞세워 홍성흔이 빠진 두산 안방을 지켜냈다. 두산은 채상병이 주전으로 출장한 85경기에서 50승1무34패, 승률 5할9푼5리라는 놀라운 성적을 냈다. 시즌 승률(0.565)보다도 3푼가량 높았고, 두산은 당당히 한국시리즈까지 올라 준우승했다. 사실 채상병의 표면적인 성적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91경기에서 타율 2할3푼7리·7홈런·30타점으로 타격성적은 홍성흔과 비교할 때 매우 평범하다. 오히려 볼넷(10개)보다 7배는 많은 삼진(69개)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채상병은 한화 류현진을 상대로 잠실구장에서 연타석 홈런을 터뜨릴 정도로 파워를 갖췄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팀 연습상대로 나선 상비군에서도 그 파워를 인정받아 4번 타자로 기용됐다. 게다가 김경문 감독은 포수의 타격보다 수비를 더 중요시한다. 채상병의 지난해 도루저지율은 1할9푼7리로 형편없지만 그만큼 투수 위주로 볼배합을 하고 있다. SK와 한국시리즈서는 도루저지율 4할4푼4리를 기록했을 만큼 도루를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다. 채상병은 김경문 감독이 연세대 시절부터 눈여겨본 재목이었다. 휘문고 시절 현재윤(삼성)·강귀태(현대)와 고교 포수랭킹 1위를 다툰 채상병은 1998년 2차 5번으로 한화에 지명됐다. 이후 연세대로 진학한 채상병은 1학년 때부터 주전포수 자리를 꿰차며 조용준(현대)·이현곤(KIA) 등과 함께 팀을 이끌었다. 권윤민(KIA)·김상훈(KIA) 등 특급포수들에 가렸지만 수준급 포수로 인정받은 채상병은 2002년 계약금 2억 원을 받고 한화에 입단했다. 국가대표 포수를 역임할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으며 주가를 끌어올린 덕이었다. 비록 채상병이 한화에 지명됐지만 이미 김경문 감독은 우연히 연세대 시절 플레이를 보고 그의 잠재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김 감독이 사령탑으로 취임하기 직전이었던 2003년 두산은 홍성흔과 강인권의 동반부상으로 심각한 포수난에 시달렸고 김 감독에게 채상병은 보험용이자 미래를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김 감독의 우직한 믿음은 결국 오늘날 어엿한 주전포수 채상병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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