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4번타자에서 촉망받는 사업가로 변신했던 이호성(41)의 일생은 '일가족 살해사건 용의자'로서 투신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마감됐다. 이호성은 선수시절 항상 중심에 있었다. 해태 4번타자로 활약하며 2할7푼2리 102홈런 526타점의 뚜렷한 기록을 남겼다. 기량뿐만 아니라 좌중을 휘어잡는 언변과 과감한 추진력, 카리스마와 근성을 두루 갖춘 해태 마지막 주장이었다. 머리도 명석한 편으로 일찌감치 미래의 타이거즈 감독감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직인 야구보다 사업을 선택한 것이 비극적인 운명으로 이어지게 됐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비전문가일 수 밖에 없는 그가 무리한 사업 확장을 시도하다 스스로 깊고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 결국 프로야구 유명스타에서 참담한 살해사건을 일으킨 용의자로 씼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됐다. 이호성은 프로 입단 후 20대 시절부터 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 90년대 중반 친 형과 함께 광주 지역에 컴퓨터 솔루션 업체와 사무용 복사기를 공급하는 회사를 설립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형은 기술 개발에 매달렸고 자신은 영업을 담당했다. 이호성에 대한 지역의 인지도가 높았고 저돌적인 추진력까지 더해져 사업은 순풍을 달았다. 그는 선수로 뛰면서도 사업을 키워나갔다. 사업 과정에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라는 든든한 기반, 광주 지역의 인맥과 광주일고 학맥까지 큰 도움이 됐다. 선수로는 선수협회 3기 회장으로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99년 12월 선수사태시절 반선수협의 수장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2000년 말부터 선수협에 깊숙히 관여, 3기 선수협 회장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해태가 KIA에 인수되기 직전인 2001년 전반기 도중 현역 연장을 놓고 이견을 보인 끝에 유니폼을 벗고 선수 생활을 끝내게 된다. 은퇴한 이호성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사업가로 변신한다. 광주 매곡동에 대규모 예식장을 만들어 웨딩사업을 시작한다. 목포와 순천에 지점 확장을 추진했을 정도로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는 사업과 함께 사회인 야구 육성 발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광주 전남 지역에 다수의 사회인 야구단과 대학교 야구단 창단을 주도했고 야구단을 운영하는 등 저변 확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광주 지역 생활체육협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웨딩사업이 부진에 빠지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부도와 함께 큰 손실을 떠안고 웨딩사업을 접은 이호성은 순천 지역에 투자자를 끌어모아 상가 건물을 신축, 스크린 경마를 유치했다. 그러나 지역 시민단체의 반대로 사업은 벽에 부딪혔고 자신이 직접 청와대 홈페이지에 투서까지 하며 안간힘을 쏟았으나 사업은 무산됐고 100억 원에 이르는 빚을 떠안게 됐다. 이후 이호성은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쏟았으나 그럴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졌다. 지난 2005년 대규모 부동산 사기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보석으로 풀려난 뒤 수도권 일대에서 재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숨진 김 모 씨를 만났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부도로 인해 치명상을 입은 탓에 재기는 어려웠다. 결국 아직도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김 씨 모녀의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았고 도피 끝에 한강에 몸을 던져 굴곡진 일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sunny@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