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귀가 되어서야 제 목소리를 낸 왕과 ‘나’
OSEN 기자
발행 2008.04.02 08: 53

SBS TV 월화사극 ‘왕과 나’가 7개월여의 일정을 마쳤다. 그 동안 제작진과 출연진이 많은 고생을 했으니 노고를 치하하는 게 순서이겠지만 그 보다 앞서 아쉬움이 크게 밀려드는 것은 왜 일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드라마여서일까? 아니다. 처음부터 넘을 수 없었던 신분과 역사의 벽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넘어설 수 있을 것처럼 작가는 바람을 잡았는데 그 바람이 허풍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찾아온 진한 아쉬움이다. 1일 밤 방송된 마지막 회에서 보인 주인공 처선의 뒤늦은 울부짖음은 어쩌면 ‘왕과 나’는 처음부터 ‘나’를 기대할 수 없었던 작품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처선은 목숨을 걸고 연산군에게 폭정을 멈추라고 직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제목에서처럼 ‘왕’과 대등한 ‘나’가 마침내 등장한다. 이미 죽어 원귀가 된 처선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연산군의 눈에 나타나 목소리를 높여 “주상”을 꾸짖는다. 때늦은 시기에 처음으로 보인 당당한 ‘나’의 모습이다. 드라마 ‘왕과 나’가 애초에 잡았던 기획의도는 이처럼 태생적으로 벽을 안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자궁을 하고 그녀를 위해 희생하는 완전한 사랑을 그리려 했지만 신분이 엄격한 시대 상황에서 내시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한정적이었다. 결국 오만석이라는 연기 잘하는 배우가 맡은 처선이지만 거세 당한 삶의 아픔을 액면 그대로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회에서 처선이 피눈물을 흘리며 연산을 향해 “임금의 도리는 잃었을지언정 사람의 도리는 버리지 말라”고 읍소하는 것은 당시 내시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최상급이었다. 더군다나 조치겸도 아닌 ‘삼능삼무’를 부여한 처선의 캐릭터로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었다. 물론 극에서는 처선의 죽음이 중종반정의 씨앗이 되는 상황으로 연결 지으려 했지만 허술한 구성으로 인해 그 느낌은 살아나지 않았다. 작가가 피해가지 못한 역사의 벽도 ‘나’를 옭아맨 사슬이었다. 실존 인물인 내시 김처선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착안해 폐비 윤씨와 성종, 그리고 연산군에 이르기까지의 비극적 인연을 픽션으로 이끌어 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역사의 벽을 넘는 데는 실패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1차적으로는 치밀하지 못했던 작가의 구성력을 탓해야 할 상황이다. 결국 사극 사상 최초로 내시들의 삶을 조명해보겠다던 ‘왕과 나’는 ‘바람둥이’ 성종과 연산군의 피비린내 나는 한풀이 쇼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100c@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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