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유망주 트레이드 '희와 비'
OSEN 기자
발행 2008.05.05 10: 22

[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 4일 1위 SK와 8위 KIA가 3대2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트레이드의 중심에는 KIA ‘좌완 유망주’ 전병두(24)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2005년 7월10일 다니엘 리오스·김주호와의 맞트레이드로 두산에서 KIA로 이적할 때에도 전병두는 유망주였다. 3년여의 시간이 흐른 현재에도 전병두는 변함없이 유망주다. 지금도 전병두는 만 24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좌완 투수이며 최고 150km를 던질 수 있는 파이어볼러다. KIA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찾았고 SK는 잃은 것 없는 매물로 미래를 도모했다. 그렇다면 역대 유망주 트레이드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1990년 김상호 1990년 1월22일 단행된 신생팀 LG와 OB의 트레이드는 유망주와 베테랑의 맞교환으로 요약됐다. MBC 25살 우타 거포 김상호와 OB 29살 우완 에이스 최일언이 맞트레이드된 것. 결과는 OB의 완승이었다. LG로 트레이드되기 전 6년간 65승을 거뒀던 최일언은 LG에서 3승에 그쳤고, 이듬해 방출돼 삼성으로 이적해야했다. 반면 김상호는 OB에서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특히 1995년에는 25홈런·101타점으로 최초의 잠실 홈런왕을 차지하며 OB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페넌트레이스 MVP까지 거머쥐었다. 김상호는 1999년 다시 LG로 돌아와 2000년 은퇴했지만 전성기는 유망주라는 이름으로 이적한 OB에서 보낸 뒤였다. 1992년 박준태 1992년 이광환 감독의 LG는 한창 세대교체를 하느라 바빴다. 1992년 6월30일 전격 단행된 윤덕규와 박준태의 1대1 맞트레이드도 그 일환이었다. 당시 만 29살로 LG를 대표하는 간판 타자 중 하나였던 윤덕규였지만, 태평양의 만 25살 젊은피 박준태와의 트레이드로 정든 줄무늬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광주일고 출신 우타 외야수로 일찍이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은 박준태는 1994년 LG의 한국시리즈 우승멤버 중 하나였지만 기대만큼 활약하지는 못했다. 매년 4월에는 4할대 타율로 맹타를 휘둘렀으나 고질적인 체력문제로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윤덕규는 1992년 포함 태평양 이적 후 보란듯이 3년 연속 3할 타율로 기량을 증명했다. 1996년 최향남 해태 시절 최향남은 ‘불펜의 선동렬’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얼핏 극찬 같지만 실은 실전에서 갖고 있는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최향남을 빗댄 뜻이기도 했다. 결국 최향남은 1996년 11월6일 해태를 떠나 LG로 이적했다.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베테랑 좌타자 최훈재와 1대1 맞트레이드됐다. 이적 당시 최향남은 만 25살 파릇파릇한 유망주였고 최훈재는 이제 막 30줄에 접어드는 베테랑이었다. 결과는 윈-윈이었다. 최향남은 LG에서 야구에 눈을 떴다. 1998년 12승을 거두는 등 LG 에이스 노릇을 했다. 노랑머리 파동만 아니었다면 한대화와 함께 LG 사상 최고의 트레이드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최훈재도 1997년 해태 우승 주역이었다. 2000년 이호준 2000년 6월1일 신생팀이었던 SK는 해태로부터 이호준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이호준을 영입하는 조건으로 베테랑 잠수함 성영재를 해태에 내줬다. 당시 해태는 마운드가 부실했고 투수가 필요했다. 당시 이호준은 만 24살로 한창 젊은 나이였고, 성영재는 전성기에서 조금씩 내려오던 시점으로 만 29살이었다. 결과적으로 이호준은 SK에서 잠재력을 폭발시켰고, 성영재는 해태·KIA에서 이렇다 할 기여가 없었다. 해태에서 1998년 3할3리·19홈런으로 가능성을 보였던 이호준은 SK 이적 후에는 3할 타율이 없었지만, 30홈런·100타점 시즌을 2년 연속 보냈고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붙박이 4번 타자로 활약했다. 올 시즌에도 부상에서 복귀시 4번이 유력하다. 2001년 김주찬 2001년 1월31일 단행된 롯데 마해영의 삼성행은 팬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선수협 파동으로 낙인이 찍힌 마해영은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다. 마해영 대신 롯데로 이적한 선수는 이계성 그리고 김주찬이었다. 충암고를 졸업하고 2000년 2차 1번으로 삼성에 지명된 김주찬은 차세대 유격수라는 평가를 받고 입단했다. 그러나 입단 첫 해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이 트레이드로 삼성은 재미를 다 봤다. 마해영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21년 묵은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 한을 풀었다. 하지만 김주찬은 아직 만 28살 젊은 피다. 올해부터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한 김주찬이기에 롯데가 만회할 여지는 많이 남았다. 2004년 김희걸 2004년 12월12일 KIA는 검증된 호타준족 박재홍을 SK로 보내는 조건으로 우완 유망주 김희걸을 받는 데 합의했다. 당시 만 31살이었던 박재홍은 기량이 정점에서 조금씩 내려오는 시점이었고, 결정적으로 팀과 융화되지 못했다. 트레이드 당시 만 23살, 고졸 4년차였던 김희걸은 2001년 2차 1번 지명선수로 잠재력이 우수한 투수로 평가됐다. 특히 트레이드 직전 해였던 2004년 47경기에서 3승3패1세이브6홀드 방어율 3.55로 가능성을 발휘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KIA 이적 후에도 김희걸은 기대만큼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KIA 이적 후 3년간 3승6패3홀드 방어율 6.01. 지난 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했다. 군제대 후 김희걸은 만 29살이 된다. 2005·2008년 전병두 KIA는 2005년 7월10일 외국인선수 다니엘 리오스와 김주호를 묶어 두산으로 보내고 좌완 유망주 전병두를 데려왔다. 트레이드 당시에만 하더라도 리오스는 이미 운이 다한 선수였고 만 21살 전병두는 미래가 기대되는 특급 유망주였다. 전병두는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로도 선발돼 군문제까지 해결했다. 하지만 리오스가 두산을 두 차례나 한국시리즈로 이끌며 두산에서 2년 반 동안 43승을 거두고 일본으로 떠나는 동안 전병두는 올해까지 11승에 그쳤다. 그래도 전병두에게는 미래가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KIA는 지금 현재가 너무 급했다. 지난 4일 SK로부터 채종범·이성우·김형철을 받는 조건으로 김연훈과 묶어 전병두를 내보냈다. 결과적으로 KIA의 2005년 트레이드는 큰 실패로 남게 됐다. 독주체제를 굳힌 SK는 당장 잃은 것이 없는 전력을 유지하며 전병두라는 미래까지 잡았다. 미국산 소고기 협상 자리에는 김성근 감독이 나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