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꾀' 김재박의 노회함
OSEN 기자
발행 2008.05.12 09: 44

[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 11일 대전구장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다. 2회초 LG 선두타자 조인성이 한화 선발 류현진에게 헛스윙 삼진을 당한 직후 LG 김재박 감독이 갑자기 그라운드로 뛰어들었다. 정진호 수석코치를 대동한 김 감독은 이례적으로 마운드까지 올라 약 10여분간 집요하게 어필했다. 갑작스런 어필이라 이틀 연속 만원사례를 이룬 대전구장 관중들은 물론 관계자들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류현진이 부상 방지를 위해 테이핑을 한 부분이 소매 끝자락에서 밖으로 비치기 때문이었다. 류현진은 테이핑을 하고 그 위에 검은색 언더셔츠를 입은 상태라 쉽게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여우’ 김재박 감독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류현진은 경기 중 갑자기 마운드를 내려가 테이핑을 모두 제거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사실 이날 피칭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류현진은 6회 2사까지 노히트노런을 펼쳤다. 하지만 6회초 안치용의 역전 투런홈런에 힘입어 어렵게 9연패에서 탈출하며 두 자릿수 연패의 굴욕을 면한 김재박 감독은 “어필해야 할 상황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항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눈에 보였고 당연히 항의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야수는 테이핑을 해도 괜찮지만 투수는 테이핑을 원래 하면 된다. 예전 박명환도 양배추를 쓰는 것이 금지됐었다. 류현진을 흔들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내가 대표팀에서 데리고 있던 친구이지 않았나”라며 특별히 류현진을 겨냥한 항의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김재박 감독의 항의는 규정상으로 정당했다. 야구규칙 8.02(b) 조항에 따르면 ‘투수가 이물질을 신체에 붙이고 있거나 지니고 있는 것’을 위반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투수는 즉시 퇴장하기로 명시돼 있다. 이날 류현진은 소매끝자락으로 테이핑이 드러난 상태였다. 많은 선수들이 부상방지 차원에서 테이핑을 하지만, 그것이 밖으로 나타날 경우 위반사항이다. 하지만 김 감독은 10여분간 항의를 한 후 심판과 합의하며 대승적인 차원에서 류현진을 퇴장시키지 않기로 동의했다. 국내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김 감독은 ‘팀이 9연패에 빠지고 최하위로 추락한 상황이라 이날 항의가 의도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시각에 대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팀이 연패 중이고, 분위기가 가라앉았으니 의도적으로 어필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실 가라앉은 팀 분위기도 바꿔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맹목적으로 류현진을 퇴장시키보다는 감독이 직접 그라운드에 나와 항의함으로써 팀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김 감독도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쨌든 LG는 연패에서 탈출했다. 김재박 감독은 비교적 점잖은 축에 속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휘어잡는 스타일이 아니다. 팀이 연패에 빠지면 많은 감독들이 ‘오버액션’을 통해 선수단 분위기 반전을 꾀한다. 지난해에는 KIA 서정환 감독이 심판에게 거세게 어필하다 퇴장당했고 2006년에는 LG 이순철 감독이 심판에 항의하며 방망이를 집어던지는 ‘쇼’를 연출해 의도적으로 선수들을 자극시켰다. 김재박 감독은 스타일상 난동을 부리거나 오버액션을 취하는 것 대신 특유의 꾀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결과적으로 LG는 한화전 12연패에서도 탈출했다. 그동안 승승장구한 김 감독에게는 익숙치 않은 일이지만 결과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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