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을 만드는 '최우선 조건'은 시간
OSEN 기자
발행 2008.05.17 11: 03

[OSEN=런던, 이건 특파원] 지난 15일(한국시간) 새벽 영국 맨체스터의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와 글래스고 레인저스(스코틀랜드)의 UEFA컵 결승전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제니트가 2-0으로 승리했고 김동진은 후반 추가시간에 교체되어 2분 여간 피치를 누볐고 이호는 결장했지만 현장에 있었다. 지난 1988년 차범근 수원 감독이 선수 시절 UEFA컵을 들어올린 이후 20년 만에 한국 선수들이 다시 UEFA컵을 든 역사적인 순간도 지켜봤다. ▲ 같은 포메이션, 다른 경기력 이 중 기자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제니트의 경기력이 아닐까 한다. 이날 제니트는 한국팬들에게 상당히 친숙한 4-2-3-1 포메이션을 들고나왔다. 지난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이 들고나왔던 이 전형은 월드컵 후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원톱을 보고 길게 공을 차주는 소위 '뻥축구' 를 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날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보여준 같은 4-2-3-1 포메이션은 전혀 다른 색깔의 축구를 보여주었다. 원톱과 좌우 윙포워드는 시종일관 위치를 바꾸어가며 레인저스를 공략했다. 좌우 풀백들의 오버래핑도 위협적이었으며 중앙 미드필더들의 날카로운 2선 침투도 빛을 발했다. 물론 선수 자원과 상대에 따라 다른 것이겠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은 2년 만에 같은 포메이션으로 다른 경기력을 선보여 지켜보던 한국 취재진을 놀라게 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경기가 끝난 후 한국 대표팀과 제니트에서 모두 뛴 김동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동진은 "감독이 패싱 플레이를 원한다. 처음에는 선수단 전체가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을 가지고 꾸준한 훈련을 했다. 잘 적응하자 리그와 UEFA컵 우승이 따라왔다" 고 답했다. 김동진의 대답에 답이 있었다. 바로 시간이었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한국 대표팀과 제니트에서 같은 포메이션으로 다른 경기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차이였다. 한국 대표팀의 자원이 제니트와 비교했을 때 나으면 나았지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이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드보카트 감독도 제니트에 자신의 색을 입히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 명장을 만드는 것은 시간 아드보카트 감독과 같은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도 지난 1986년 맨유에 부임한 후 1990년 FA컵에서 우승할 때까지 4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아르센 웽거 아스날 감독도 1996년 부임 이후 첫 번째 우승까지 2년을 기다려야 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 역시 한국 대표팀을 맡아 2년이라는 충분한 준비 시간을 가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실패했을때도 시간을 얻었다는 것이다. 퍼거슨 감독도 웽거 감독도 팀을 맡은 이후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이때마다 팬들과 클럽의 운영진들은 이들에게 시간을 주었다. 실패 사례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했고 고쳐나감으로써 지금의 명문 클럽을 만들 수 있었다. K리그에서도 이런 사례는 찾아볼 수 있다. 김호 감독도 수원 창단 감독으로 1996년 첫 시즌을 시작한 이후 1998년 리그 우승까지 2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김학범 성남 감독도 데뷔 첫 해인 2005년에는 우승하지 못했다. 전북의 최강희 감독은 리그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 실패를 바탕으로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 수 있었다. 지난 시즌 우승을 차지한 포항의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도 2005년 부임한 이후 3시즌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올 시즌 무패행진을 펼치고 있는 수원의 차범근 감독 역시 최근 몇 시즌간 '그런 선수들 가지고도 우승하지 못한다' 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이들 역시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부여받고 설욕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명장을 만들고 좋은 성적을 만드는 것은 '시간' 인 것이다. 감독은 선수를 춤추게 만들지만 시간은 감독을 춤추게 만든다. bbadagun@osen.co.kr 딕 아드보카트-알렉스 퍼거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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