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상)]‘삼손’이상훈, “LG에서 은퇴하지 못한 것, 지금도 아쉽다”
OSEN 기자
발행 2008.06.26 15: 06

2004년 5월 29일, 이상훈(38)이 느닷없이 은퇴의사를 밝혔다. 그 나흘 뒤인 6월 2일 SK 와이번스 구단측은 은퇴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던 이상훈과 최종 면담을 거친 다음 6월 7일 공식적으로 그의 은퇴를 발표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상훈은 그렇게 그라운드를 떠났다. 마치 거짓말처럼. 이상훈은 자신의 은퇴 이유에 대해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내 처지가 현재 팀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잘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이런 식으로 야구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한 것이 고작이었다.
‘야생마’, ‘삼손’ 등의 애칭으로 야구팬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가 그라운드를 뒤로한 까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궁금증을 갖게 됐다. 그 해 이상훈의 연봉은 6억 원.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그는 거액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달콤한, 그러나 아주 고통스러웠을 그 선택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은퇴 당시 그의 남은 연봉은 3억 6000만 원. SK는 규정에 따라 잔여 연봉을 단 한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눈으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그의 선택이었다. 변변한 은퇴식조차 갖지못하고 홀연 야구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이상훈은 그 후 로커로 변신했고, 최근엔 ‘뷰티숍’ 경영자로 탈바꿈했다. 아울러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아주 소박한 공간도 따로 마련하는 등 새 사업 도전에 나섰다.
뷰티숍과 맥주집, 언뜻 공통의 이미지가 와닿지 않는 그 공간의 이름은 ‘클로저(closer)47’로 똑같다. 상호에서 유추할 수 있듯(마무리와 자신의 현역시절 등번호를 합성한 것) 야구의 냄새가 은근히 풍긴다. 그렇지만, 뷰티숍은 물론 맥주집에서도 그의 야구 인생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다만 ‘팬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맥주집에는 ‘배번 47’이 선명한 국가대표 시절의 유니폼 한 벌을 한쪽 벽면에 걸어놓았을 뿐이다.
이상훈은 그 이유로 “티를 내기 싫어서”라고 말했다.
지난 6월 24일, 이상훈을 만났다. 그의 야구인생과 야구에 대한 얘기를 주제로 삼아 OSEN 천일평 편집인이 대화 맞상대로 나섰다. 오후 4시 반께부터 뷰티숍에서 시작한 대화는 야구인 정영규(광주일고, 동국대, 삼성 라이온즈 등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내야수 출신으로 이상훈과 야구 동기생이다)의 포장마차(서울 신사동 ‘메이저리그’)를 거쳐 ‘클로저47’(서울 신사동)로 이어졌고 자정을 넘긴 시각까지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날, 이상훈은 자신의 은퇴 이유와 그 동안의 야구의 삶 등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은퇴 후 아직 어느 누구한테도, 어떤 매스컴에도 (은퇴 이유에 대해) 한마디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이상훈은 ‘야성’이 상당히 순치된 정제된 발언이었지만,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아주 거친 언사로 지나간 야구인의 길과 삶을 설명했다.
이상훈의 야구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격렬함과 열정 두 단어로 압축 시켜 풀이할 수 있겠다. 이상훈은 간헐적으로 로커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토로했는데,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 로커들을 가차없이 질타하기도 했다.
-야구를 보는가.
원래 TV를 잘 안본다. 어쩌다가 연습실에서 채널을 돌리다가 ‘걸리면’ 본다. LG 선수들 가운데 최동수나 류택현, 권용관, 조인성 등이 선수생활을 같이 했는데 뭐 ‘아는 놈’이 있어야 보지.
-아무래도 LG 생각이 많이 나겠다.
LG 얘기는 많이 듣는다. 맥주집에 팬이 많이 오는데 얘기는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답답한 얘기들을 많이한다. 그들이야 팬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이지만, ‘뭔가 하고 져야하지 않겠는가’ 같은 말들을 한다. 선수들이 무기력하면 팬도 무기력해지고, 짜증난다. LG팬은 그래도 괜찮다. ‘중독’이 돼서 어느새 야구장에 가 있고….
-LG 7년간 성적이 안좋았을 때가 언제였나.
1996년 전반기에 허리를 다쳤을 때였다. 당시 분위기는 ‘오합지졸’같았다. 있던 선수 빠지고, 제 자리 못지키고, 왔다 갔다 하고.
-LG 분위기가 너무 자유분방하지 않나. ‘밤 이슬, 새벽 이슬, 아침 이슬’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나.
전 나이트클럽 안다녀서…(웃음). 그 연장선상에서 말씀드리자면 ‘2년차 징크스’라는 것은 1년차에 잘 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신문보도를 보면, 투구폼이 들통나서, ‘쿠세(일본어로 나쁜 버릇)가 들통 나서’그렇다고 하는데, 상대 견제 때문에 위축돼서 그렇다고 해야할 것이다. 야구는 멘탈 게임이다. 입단 첫 해 잘 하면 주위에 사람이 많이 붙는다. ‘이슬’맞게 해주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 선수는 똥오줌을 못가린다. 쉽게 말하면 ‘스폰(서)’을 해주는 것인데, 그 사람은 선수를 이용해 제 얼굴 과시하는 것이고. 그렇더라도 야구장에 나가면 달라져야 하는데 안좋은 방향으로 자꾸 이어지고, 부상을 당하고…. 저는 그런 일에 완전히 담을 쌓아버렸다. 그 사람들은 만나자마자 반말한다. 시도 때도 없이 술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나야”,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바꿔줄게”, 다른 데 가서 “내가 이상훈을 잘 아는데”, 그런 식이다. 왜 그런 사람들한테 반말을 들어야 하나. 그런 자리를 피하니까, “싸가지가 없다”는 둥 그런 소리를 듣게 됐다.
-굳이 편한 길을 놔두고 왜 그렇게 어렵게 사나. SK에서 참고 견뎠다면 거액이 보장되는 것 아닌가.
남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6억 받아가며 내년을 준비하자’, 그런 생각으로 2년을 더 뛰었다면 자유계약(FA) 신분이 되는데 그랬다면 20~30억 원은 벌었을 것이다. 그러면 매스컴에서는 ‘역경을 딛고 재기에 성공’, 그러겠지. 하지만 그것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일 뿐이다. ‘프로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마운드에 서 있는데 내 정신이 타자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됐다. 성적하고도 맞물려 있긴 했지만, 마운드에서 타자를 집중 공략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 게 안된다고 판단했다. 팬은 자기 돈 내고 야구가 좋아 찾아온 사람들이다. 이러는 것은 ‘이상훈답지 못하다’, 이럴 바에야 그만둬야겠다, 그렇게 판단했다. 선수로만 스트레스를 이겨내야할 의무가 있는데, 이미 다른 걸로(2004년 1월 14일 LG에서 SK로 트레이드된 것을 일컫는 듯)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것은 LG에서 SK로 넘어가지말고 그만 뒀어야 했는데…. 항상 그 게 아쉽다. 시대와의 불화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상훈은 아직도 ‘자기 기만’을 못견뎌하는 순정한 마음을 지닌 ‘고독한 야생마’ 같다. 그의 격렬한 토로는 좀 더 이어진다.(계속) chuam@osen.co.kr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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