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 이상훈(38)이 은퇴(2004년 6월)를 결심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연봉 6억 원짜리 선수가 제 구실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형편없는 성적을 내는 그런 상황을 이상훈은 못견뎌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다.
중동무이로 글러브를 벗었던 이상훈은 “어쨌든 SK로 갔는데 하는 것보다 그만두는 게 제일 힘든 것”이라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던 시절을 반추하면서 “당시 조범현 감독과 SK 구단에 죄를 많이 지었다”는 말로 이해를 구했다.

-은퇴를 선언한 다음에 야구계에 몸담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가.
"그만둔 후 그 다음해에 ‘선수로 다시 뛰거나 코치나 해설을 하지않겠느냐’는 의향을 타진받은 적이 있었다. 아마추어 지도자 얘기도 나왔으나 그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선배한테 못된 짓을 한 내가 (야구를) 다시 하면 안된다. 게임에도 보이지 않는 예의가 있다."
-마지막 배번 47번을 영구결번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상황도 안되고,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47번은 톰 글래빈을 좋아해서 LG에 입단할 때부터 달았는데 일본 주니치로 가서는 17번,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40번이었다. 47번은 ‘어색한’번호이다. 투수라면 1, 11, 21, 27, 31…, 뭐 이런 번호가 어울리는데. 47번은 원래 해태 시절 ‘까치’ 김정수 선배가 달았다. LG에서 후배인 봉중근이 달고 싶어했다는데 나로선 영광이다. 봉중근이 진정한 47번이 되려면 3년은 ‘긁어야(제대로 던져야한다는 뜻)’한다. 욕심같아서는 잘 했으면 좋겠다."
-선수생활 때 수술받은 적이 있는가.
"수술받은 일은 없지만 온 몸이 아프지 않은 때가 없었다. 허리 척추분리증이나 손가락 혈행장애에 시달렸고, 다리엔 온통 테이핑을 하고 던졌다. 어깨 때문에 고생도 했고. 나는 오른쪽 어깨가 뼈가 어긋나면 앞이나 뒤로 돌아간다. 그럴 때면 엄청난 통증이 뒤따랐다. 자다가도 어깨가 빠진 일도 있다. 1996년에 가장 고통스러웠다. 중학교 때는 그로 인해 밥도 못먹은 적이 있다."
-LG에 계속 있었으면 어땠을까. 왜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됐나.
"LG에서 이광환 감독 시절 1.5군이 플로리다 교육리그에 다녀오면 꼭 선수들에게 발표를 시켰다. 미국애들은 그라운드에서 눈에 불을 켜고 야구를 한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이런 얘기를 자꾸 들으니까 성질이 났다. 우리는 눈에 불을 안켜는가. 아, 걔네들하고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주니치로 가게 됐는데, 우격다짐이었다. 나름대로 LG에서 5년간(1993년~1997년) 공도 많이 세웠고, 물론 댓가는 받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한 번도 ‘메이저리거가 되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주니치에서 2년간 계약기간이 끝나고 구단(LG)과 약속했던대로 메이저리그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니치는 나를 붙잡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통역을 통해서, 나중에는 따로 불러 일본말로 얘기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거가 안된 이유는.
"내 책임이다. 그리고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는 팀이 굉장히 셌다. 비슷한 실력이면 백인을 쓰고, 연봉이 많은 선수를 우선적으로 기용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도 작용했을 것이다. 1999년 여름 팬웨이파크에서 가진 첫 등판 때는 정신이 없었다.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부상으로 빠져 ‘3박4일 메이저리거’로 잠깐 뛰어줬다. 마이너 원정지에서 메이저리그로, 다시 마이너로 내려가는데 무려 6번이나 비행기를 탔다. 팬웨이파크는 불펜이 홈, 어웨이가 붙어 있는데 난생 처음 가봐 원정팀 시애틀 마리너스쪽으로 걸어 갔더니 레드삭스 선수들이 손짓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샤워라도 할까 했으나 갑자기 몸을 풀라는 지시를 받고 1이닝을 던졌다. 당시 알렉스 로드리게스한테 담장 넘어가는 대형홈런을 얻어맞았다.
-버니 윌리엄스가 ‘기타맨’소리를 들으며 레코드도 냈는데, 그 때도 기타를 가지고 다녔나.
"당연히 가지고 다녔다. 그 게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첫 무대는 LG 신인 때 오키나와 전지훈련을 갔을때였다. 구시카와 시청에서 선수단과 기자단에 파티를 열어줬는데 장기자랑 시간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나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신인왕, 다승왕, 세이브왕, 팀 우승 등 이런 식으로 한 번도 무슨 목표를 내세워 말한 적이 없다. 메이저리그도 무엇을 이루려고 간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해보고 싶었다. 돌아올 때는 ‘아! 이거 똑같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인생으론 배운 게 많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극복할 힘을 얻었다. 그런 힘이 생겼다.
-선동렬 감독을 슈퍼스타라고 했던데, 왜 그런가.
"딱 보면 느끼시는 것이 없는가. 특정인 한사람을 말하면 오해를 살 수 있겠지만, 슈퍼스타는 하늘이 주신 것이다. 선동렬 선배같은 사람은 풍기는 것이 다르다. 2년간 옆에서 생활(주니치 시절)도 해봤고, 멀리서 봤을 때나 가까이서 봤을 때도 언제나 품위가 있다.
-요즘 우리 선수들이 야구하는 것을 어떻게 보고 있나.
"선수는 동작 하나하나가 ‘광채’가 나야한다. 투수가 마운드로 올라가는 것, 마운드판을 쓰는 것 등등이 티를 안내고 광채가 나야한다. 마무리 투수라면, 세이브 상황을 미리 머리 속에 그리고 7회 정도에는 몸을 풀어 놓아야한다. 경기가 뒤져 있으면 아예 몸도 풀지 않고 있다가 경기가 뒤집히면 허겁지겁 그제서야 몸을 푸는 어떤 선수(이상훈은 이 대목에서 특정선수를 실명 거론했다)같이 하면 안된다."
-SK가 독주태세이다. 김성근 감독같은 지도자를 어떻게 보는가.
"김성근 감독은 잘 하는 선수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하지만 잘 못하는 선수는 ‘사람을 잡는’ 스타일이다."
야구와 노래로 한 세월을 보냈던 풍운아 이상훈은 비록 그라운드는 아니지만, 록그룹 WHAT의 리드싱어로, 뷰티숍을 운영하는 경영자로 여전히 우리 곁에 새롭게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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