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작품이 끝난 뒤에도 내가 연기했던 배역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너무 힘들었어요.”
흔히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을 보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말한다. 명배우라고 손꼽히는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찬사를 받곤 한다.
지난 1월에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과 ‘다크 나이트’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히스레저(29세)가 뉴욕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돼 큰 충격을 주었다. 사망원인은 약물복용으로 인한 쇼크사로 결론 내려졌지만 ‘다크 나이트’에서 악역인 ‘조커’ 역할이 그의 사인에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추측도 일고 있다.
여러 외신에 따르면 히스레저는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광기에 휩싸인 악인 조커를 연기하면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으며, 조커 역을 연기하기 위해 한 달간 호텔에서 혼자 생활하며, 캐릭터의 몸짓과 목소리, 심리를 연구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그의 연기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말처럼 ‘감정 없는 정신분열증 살인광의 모습’을 제대로 섬뜩하게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만든 한 요소가 되어 팬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 작품 속 배역에 대한 극한 몰입이 정체성 혼란의 원인
배우라는 직업은 다양한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선택 받은 직업일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는 어려운 직업임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어느 여배우는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배역 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고 고백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한 남자 영화배우는 작품 촬영이 끝난 뒤에도 작품 속 인물의 말투나, 행동, 느낌들을 버릴 수 없어 한동안 그 인물로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서 빨리 빠져 나오지 못해 장기간 지속될 경우 우울증이나 조울증과 같은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주의가 필요하다.
김양래 휴 신경정신과 김양래 원장은 “배우들의 경우 자신이 맡은 배역을 완벽히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촬영기간 동안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닌 다른 성격의 삶을 살아야 하는 만큼 충분히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 있다”며 “문제는 촬영이 끝난 후에도 혼란에서 빨리 빠져 나오지 못할 경우 심한 후유증을 겪을 수 있으며, 때로는 심한 우울증을 겪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 작품 후 충분한 휴식 절대적으로 필요
정체성이란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적, 심리적 특성을 말하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와 같은 개인의 신념 등을 뜻한다. 정체성은 안정되고 고정적이며 지속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상호 교류를 통해 형성, 변화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배우들의 경우 새로운 작품에 임하게 되면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또 현실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말투, 인물들과의 관계를 이루며 단기간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런 경우 새 인물에 대한 극한 몰입으로 현실에서의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역할 속의 자신이 진짜 모습인지 혼란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인물에 대한 극한 몰입이 연기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직업 특성상 극한 몰입은 배우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정체성 혼란은 대부분 충분한 휴식을 통해서 충분히 회복될 수 있지만, 자신을 되돌아 볼 충분한 시간이 없거나 다음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 공백 기간이 길어져 불안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또는 우울하거나 암울한 배역을 오랜 기간 소화해내다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해 질 수 있다. 그러나 배우들의 경우 세간의 이미지 때문에 자신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쉽게 병원을 찾아 상담 받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김양래 원장은 “배우들의 경우 작품이 끝나면 충분한 휴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충분한 휴식을 통해 대부분 이러한 혼란이 사라지지만 작품 후 정체성 혼란으로 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거나, 장기간 문제가 반복된다면 세상의 시선 때문에 혼자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절대 삼가 하고,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나은 배우로서의 삶을 사는 지름길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전문가들의 배우들의 특성상 현재의 인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소속사 또는 본인이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도록 몰아붙여 상황이 더욱 악화 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작품 후 배우 본인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와 도움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글=김양래 휴 신경정신과 김양래 원장 [OSEN=생활경제팀] osenlif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