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대호 객원기자] 김응룡 사장-김재하 단장의 '8년 동거'가 파경 직전이다. 삼성 라이온즈의 두 최고경영자는 최근 잇달아 터진 불미스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기로 했다. 그룹 최고경영진의 결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두 명 모두 현직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2000년 10월 김응룡 사장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은 8년 동안 감독과 단장, 사장과 단장으로 호흡을 맞추며 삼성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초창기엔 의사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아 서로 오해를 한 적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만큼 '찰떡궁합'을 발휘한 조합도 없다. 삼성은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을 제외하고 2000년까지 19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한국시리즈 우승과 입맞춤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응룡 감독이 온 2001시즌 이후 올해까지 세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둬 삼성팬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줬다. 우승이라는 절대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성 속에 해태를 심은 인물이 바로 김재하 단장이다. 김 단장은 삼성그룹의 사관학교격인 제일모직 경리파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머리회전이 빠르고, 상황 판단력이 매우 뛰어나다. 대구상고 출신으로 열렬한 야구팬이었던 김 단장은 1982년 삼성 창단 업무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 뒤 야구단을 떠나 제일모직에 근무하면서 이사에 오른 김 단장은 1999년 야구단 단장으로 금의환향했다. 김 단장은 취임하자마자 삼성이 우승으로 가는 첩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해태 벤치마킹'이었다. 야구판에서는 제 아무리 삼성이라고 해도 우승을 9번이나 한 해태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고 자존심이 상해도 배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전에 삼성을 거쳐 갔던 수십 명의 경영진과는 접근방식이 달랐다. '김응룡 스카우트'가 김재하 단장이 시도한 첫 프로젝트였다. 이 계획을 세운 지 1년 만인 2000년 10월 당시 김응룡 해태 감독은 삼성 감독으로 말을 갈아 탔다. 그 뒤로 김재하 단장은 대구출신 스타플레이어에 안주하지 않고 각 팀의 스타들을 그야말로 긁어 모았다. 심정수 박진만 박종호 마해영 김기태 김동수 노장진 등 각팀 간판선수들이 잇달아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여기에는 야구계로 봐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됐다. 김응룡 감독의 지도력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김재하 단장이 이 처럼 자신이 구상한 계획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국내 프로야구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단장으로서의 역할을 100% 수행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신필렬 사장(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김 단장에게 팀 운영과 관련된 전권을 위임했다. 김응룡 감독은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2001년 페넌트레이스 1위에 이어 2002년 마침내 한국시리즈 우승의 대업을 이뤘다. 우승에 대한 '갈증'을 해소한 김재하 단장의 2차 프로젝트는 '영원한 강자 삼성'이었다. 이를 위해 김 단장은 2005년 김응룡 감독을 사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선동렬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김응룡 사장과 김재하 단장의 관계는 경기인 출신 CEO와 제너럴메니저의 이상적인 전형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응룡 사장-김재하 단장-선동렬 감독의 '삼각시스템'은 경기운영과 구단관리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착착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올 스토브리그들어 장원삼 30억 원 현금트레이드 승인거부 사태에 이어 인터넷 상습도박까지 예기치 못한 악재가 이어 터지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영원한 강자로 가는 길도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아울러 야구계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김응룡-김재하 신화'는 서서히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김응룡 삼성 사장(왼쪽)과 김재하 단장. 온라인으로 받아보는 스포츠 신문, 디지털 무가지 OSEN Fun&Fun, 매일 3판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