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은 내년에도 '야구천재' 이종범(38)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이종범은 은퇴위기에 몰렸지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살아났다. 자신의 선수생활에 대한 강한 의지, 팬들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구단의 기회 부여였다.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뒷받침이 없었더라도 그는 유니폼을 벗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년이면 이종범은 프로 데뷔 17년 째를 맞는다. 일본에서 3시즌 반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14시즌 째이다. 90년대 중반 프로야구 슈퍼스타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였지만 이제 우리나이로 불혹에 접어든다. 이종범의 최전성기는 역시 해태시절이었다. 93년 루키로 입단, 그 해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이후 97년까지 페넌트레이스 MVP, 3할9푼3리, 196안타, 84도루, 30-30클럽 등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 93시즌, 96~97시즌 해태가 우승했던 절대적인 이유는 이종범의 존재였다. 야구천재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종범이 주니치에 입단하자 김응용 감독 "종범이도 가고~"라는 말은 그만큼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년 반동안 일본 주니치 시절의 아쉬움을 남기고 귀국한 2001년 6월. 해태는 KIA로 바뀌었다. 이종범의 나이 31살이었다. KIA로서는 창단과 함께 재도약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KIA에서는 부침이 있었다. 해태시절의 화려했던 이종범은 아니었다. KIA에서 8시즌 동안 3할 이상 타율은 세 차례였다. 1할대를 한 차례 치기도 했다. 8년 통산 2할8푼을 기록했다. 8년간 도루(184개)는 5년동안 해태시절(310개)의 절반을 조금 넘었다. 워낙 많은 도루를 하다보니 지칠 수 밖에 없었다. 홈런수도 8년동안 75개를 터트렸다. 해태시절은 106개를 기록했다. 이종범은 2003년 타율 3할1푼5리, 20홈런, 50도루를 기점으로 하향곡선을 그렸다. 절대전력이었던 이종범의 하향세는 결과적으로 KIA가 창단이후 한번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해태 시절부터 이종범은 팀의 운명을 가르는 방향타였다. 이 점에서는 KIA도 마찬가지였다. 성적 뿐만 아니라 팀 분위기의 중심이었던 이종범에게 많은 것을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이종범도 매년 V10을 약속했으나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이종범은 '은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나이가 됐다. 이종범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그라운드에서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은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주전경쟁에서 밀릴 수 있고 아예 2군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이제 '해태 이종범'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팬들은 해태 이종범스럽게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정상에서 활짝 웃기를 기대하고 있다. sunny@osen.co.kr 지난 1995년 한일슈퍼게임서 이치로와 악수를 나누는 해태 시절 이종범과 현재의 이종범. 온라인으로 받아보는 스포츠 신문, 디지털 무가지 OSEN Fun&Fun, 매일 3판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