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향남의 '잡초'같은 인생, 못말리는 도전
OSEN 기자
발행 2009.01.15 08: 15

[OSEN=김대호 객원기자] '풍운아' 최향남(38.롯데)이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문턱에 섰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4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최향남에 대한 신분조회를 요청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입단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계약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최향남이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경우 한국야구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진다. 이상훈(전 SK)에 이어 국내 프로야구 출신 두 번째 메이저리그행이며, 최고령 메이저리그 진출의 기록도 세우게 된다. 특히 국내 구단에서 퇴물취급을 받고 2006년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뒤 3년 만에 메이저리그 진입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케이스보다 그 의미가 크다. 최향남의 야구인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처럼 파란만장하다. 최향남은 1971년 전남 신안에서 지독히도 가난한 집안의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최향남은 목포 영흥고 시절 초고교급 투수로 각광을 받았다. 프로구단과 대학 스카우트 사이에서는 '제2의 선동렬'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연고구단인 해태에서는 1989년 최향남을 데려오기 위해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대학진학을 원했던 최향남은 동국대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영흥고측의 서류미비로 입학이 취소되는 '황당사건'을 겪게 된다. 졸지에 대학생의 꿈을 날려버린 최향남은 서울에서 막노동판을 돌아다니며 가혹한 운명을 저주했다. 때마침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해태는 쾌재를 부르며 입단을 종용해 왔다. 오갈 데 없는 최향남은 계약금 한 푼 없이 연봉 500만 원의 헐값에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고교 최고 유망주가 한순간에 연습생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프로에 입단한 뒤로도 최향남의 야구인생은 순조롭지 못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최향남은 해태의 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유망주'라는 꼬리표마저 떨어져 나간 최향남은 1991년 자원 입대를 결심한다. 경기도 연천의 포병부대에서 일반병으로 3년을 꼬박 보낸 최향남은 1995년 해태에 복귀했지만 오랜 공백 후유증 탓에 실력은 더욱 곤두박질쳤다. '새가슴'이란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최향남은 1997년 7년 동안의 해태생활을 접고 LG로 트레이드됐다. 최향남 최고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해태에서 통산 단 1승에 그쳤던 최향남은 1997년부터 3년 동안 28승을 올리며 LG의 대들보 투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번엔 '아파치 머리사건'으로 유명한 머리카락 염색 파문을 일으키며 LG에서도 버림받고 말았다. 때 마침 어깨부상에 시달리던 최향남은 2004년 고향팀 KIA에서 불꽃을 태워보려고 했지만 2년 만에 짐을 싸야 했다. 다른 선수 같았으면 선수생활을 접었을 상황이었지만 최향남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2007년, 최향남은 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플A에서 8승5패, 평균자책점 2.37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때 나이가 만 36세였다.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메이저리그 문을 두드리고 있는 최향남. 그의 '잡초'같은 야구인생의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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