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내야수 박종섭, "울면서 수비 연습, 야구하는 자체가 행복"
OSEN 기자
발행 2009.01.20 15: 29

"연습을 하고 싶었는데 무소속이라 서글펐습니다." 프로 2년차 내야수 박종섭(26. 두산 베어스)은 사연이 많은 선수다. 고교(배명고) 시절 또래들 중 수준급 유격수로 평가받으며 '박찬호 장학금'의 수혜자가 되는 등 탄탄대로를 걷다가 '병풍'에 휘말려 3년 간 야구를 하지 못했다. 그것도 프로에 적을 둔 것이 아닌, 지명권을 쥐고 프로 입단을 기다리던 한양대 3년 시절 적발되어 8개월 간 구속수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소집해제 후 고교 시절 지명권을 풀지 않은 두산에 입단, 곧바로 미야자키 교육리그서 맹활약을 펼치며 주전 유격수 물망에도 올랐다. 그러나 3년 간의 공백은 공,수 양면서 약점을 가져다 주었고 박종섭은 2008년을 꼬박 2군에서 보내야 했다. 박종섭의 지난 시즌 2군 성적은 2할4푼8리(77경기)에 홈런 없이 18타점 8도루에 그쳤다. 지난해 1군에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박종섭은 현재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베어스 필드로 출퇴근하며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19일 이천서 만난 그는 "지금의 어려움이 훗날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속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며 양쪽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었다. 타격 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그의 손을 보며 마치 지난해 김현수(21)의 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 굳은 살이 채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박종섭의 손바닥 표면은 김현수의 그것보다 더욱 거칠었다. 소속이 없다는 것이 가장 서러웠다 병역 비리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수업과는 별개로 학창 시절 운동만 해왔던 '체육 특기자'들에게 병역 면제는 위험한 유혹과도 같았다. 2000년대 초,중반 고교 시절 프로팀에 지명받았던 선수들이 대학 진학 후 지명권을 잃어 갈 곳이 없어지는 전례가 속출했음을 감안하면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는 더욱 달콤하게 다가왔다. 더욱이 박종섭은 한양대 진학 이후 3학년 시절 5개월 간 투수 수업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천보성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다시 내야수로 돌아갔으나 고교 시절만큼 확실하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에 불안감은 더해졌다. 그의 불안은 잘못된 선택을 낳았고 결국 야구를 그만두어야 하는 위기까지 초래했다. "일이 터지고 나서 수감되어 있는 8개월 동안 함께 복역 중이던 학교 1년 선배가 프로 입단을 거의 다 확정지었다가 지명 포기 소식을 들었어요. 그 때 저도 '아, 이제 야구를 할 수 없겠구나'하면서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더 힘들었던 건 그 이후였습니다" 형기를 마친 후 공익 근무 요원으로 복무하게 된 그는 퇴근 이후 야구를 이어가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프로에 소속된 선수의 경우 팀의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 등을 이용할 수 있었으나 자퇴를 각오하고 나섰던 '대학생' 박종섭이었기에 한양대로 돌아가 후배, 동기들과 실전 훈련을 함께 하기 힘들었다. 틈이 날 때마다 배명고를 찾아 후배들과 연습을 하기도 했으나 실전 감각을 찾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시간을 쪼개서 훈련을 하긴 했습니다만 고교 투수들이 던지는 공으로 타격 적응력을 키우기는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서러움에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천 감독님의 배려로 한양대에 가끔 가기도 했습니다만 마침 연습 경기가 잡혀 있더라구요. 러닝 밖에는 할 게 없었습니다" 3년 간의 공백기, 어쩔 수 없더라 소집 해제 후 복학과 두산 입단 사이에서 박종섭은 후자를 택했다. 오래 전 야구를 시작한 만큼 그의 최종 목표는 프로 무대를 밟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분이 몇 번이나 바뀌는 우여곡절 속에도 자신에 대한 구단의 지명권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 선택은 당연했다. "학교에 복학해서 4학년을 마치고 나면 고교 졸업 후 6년이 지나 지명권이 자동 소멸되는 시기였습니다. 천 감독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학적이 남아있었지만 최종 목표가 프로 입단이었던 만큼 양해를 구하고 프로 입단을 선택했습니다" 박종섭은 보름 동안 두산에서 몸 만들기 및 간단한 테스트를 받은 뒤 일본 미야자키의 휘닉스 교육리그에 참가했다. 일본 12개 구단 1.5군이 참가한 이 리그서 박종섭은 한 경기 도루 3개를 성공시키는 등 2번 타자 겸 유격수로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 리그에는 니혼햄의 우완 에이스 출신 가네무라 사토루(33. 현 한신), 2008 일본 시리즈 MVP 기시 다카유키(25. 세이부) 등 녹록지 않은 투수들이 참가했기에 그의 활약은 수치보다도 더 높게 평가되었다. "운이 좋았어요. 공을 때려내 봐야 고교 후배들의 공을 친 정도에 불과했는데 타격이 생각보다 잘 되더라구요. 교육리그때까지는 굉장히 좋았는데 2달 정도 쉬고 미야자키 전지훈련에 포함되었을 때는 3년 간의 공백이 몸에 배어 나왔습니다" 빠른 발과 강한 어깨 등 좋은 운동 능력을 갖췄지만 수비 중심이 높아 유격수로 기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타격 면에서 떨어진 적응력은 그의 입지를 급격히 좁게 만들었다. 2007년 연말 팀 내 기대감을 높였던 박종섭은 그렇게 2군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3년 동안 거의 제대로 된 훈련을 못한 만큼 연습 경기 때도 적응이 어려웠습니다. 워낙 체감한 벽이 높아 처음에는 자책감도 들고. 최근에는 최훈재 타격 코치님과 함께 예전 타격폼으로 수정해 감을 찾고 있습니다" 울다 보니 감이 잡혔다…야구를 하는 자체가 행복 지난해 박종섭은 정규 훈련을 마치고도 거의 매일 한영준 수비 코치와 1-1 훈련에 2시간 정도 할애했다. 한 코치는 박종섭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자 "워낙 어려운 상황에서 입단한 친구다. 야구를 하겠다는 일념에 가득 차 있던 만큼 '하겠다는 선수'에게 더 가르쳐 주어야 했다"라며 '스파르타' 훈련의 이유를 밝혔다. "정말 울면서 연습 할 정도였습니다. 워낙 훈련 강도가 셌으니까요. 그런데 하루하루 연습을 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수비 중심도 낮아지고 동작도 간결해지는, 제대로 된 자세를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수비 자세에 있어서는 1군 선배님들과 경쟁해도 자신 있습니다" 최근 박종섭은 마치 고등학생처럼 매일 아침 6시 반에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잠실 구장에 도착, 이천으로 다시 이동해 훈련을 하고 있다. 차를 가지고 있음에도 일부러 대중 교통을 이용하며 출퇴근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제게는 야구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계속 고생하고 계속 노력해야죠.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데에 비하면 불편하긴 하지만 이렇게 야구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행복일 뿐더러 힘들었던 만큼 나중에 1군에 올라 제 이름을 알릴 수 있기 되었을 때 더 환하게 웃고 싶습니다" 마무리 훈련 종료 후 휴식기 동안 라섹 수술을 하는 동시에 다른 타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했던 '빛번짐 현상'까지 막는 수술을 했다고 밝힌 박종섭은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활약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늦둥이'인 만큼 부모님께 아들의 자랑스러운 활약을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은 더욱 컸다. "손위 누나와 10살 터울이 날 정도로 늦둥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정년 퇴임을 하셨구요. 우리 나이 27이면 선수로 적은 나이가 아니잖습니까. 그만큼 꼭 1군에 올라서서 부모님께도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farinelli@osen.co.kr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