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상업적으로 주목받던 한국 뮤지컬계는 다양한 기법들을 선보이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국내외 기술진의 교류와 협력으로 새롭게 시도되는 다양한 장르의 뮤지컬들이 등장했다. 이런 변화들은 작품의 깊이를 파는 창작과는 별개로 관객과의 소통 방식을 다양하게 구사하며 소재의 신선함과 기술력의 용기 있는 도전을 무기로 관객들을 파고 들었다.
2009년 뮤지컬은 어떠한가? 2009년 뮤지컬은 범 세계적인 불황과 정면으로 맞서며 대극장 무대에서 이름 값하는 대작들이 줄줄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2009년 1월을 마감하고 2월이 넘어가는 무렵에 대형뮤지컬 몇 작품을 통해 화려하게 성장한 ‘빅 쇼’의 공연계 성과를 짚어본다.
‘돈 주앙(Don Juan)’…환상적인 무대 위에 작아지는 주연들
스페인의 전설적인 옴므 파탈 ‘돈 주앙(Don Juan)’의 삶이 지난 6일부터 성남아트센터 무대 위에 올랐다. 세계적인 뮤지컬 제작진의 협력 속에 화려하고 격렬한 무대가 기대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돈 주앙'은 2006년 오리지널 내한공연의 환상적인 조명과 스페인 무희들의 화려한 의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덕분에 안정적인 협력제작진의 무대로 첫 공연부터 주목을 받았다. 130개 이상의 무빙 라이트의 섬세한 조명의 움직임에는 2006년에 이어 2009년에도 어김없이 찬사가 쏟아졌다. 40cm 두께의 나무로 견고하게 제작한 원형무대 역시, 놀라운 기술진의 협력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무대효과에 있어 전반적인 연출은 거의 완벽했다. 게다가 스페인 댄서들의 리얼한 연기는 화려한 의상과 더해져 매혹적인 매력을 더했다. 스페인 댄서들의 표정과 안무는 완벽에 가깝다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이들의 노래와 안무는 극의 긴장감을 더했고 관객들은 볼거리 풍성한 ‘돈 주앙’의 무대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주연배우들의 비중은 약했다. 노래와 연기가 조연에 비해 약하다는 평이다. 무대 위에 펼쳐지는 '쇼'에 관객들이 시선을 빼앗겨 버린 격이다. 관객은 주연들의 드라마에 빠져들기보단 무대에서 펼쳐지는 화려함과 귀에 들려오는 익숙한 뮤지컬 넘버들로 흥겨웠을 뿐이다.
기본기 탄탄한 '렌트’…신인배우의 한계로 ‘주춤’
국내에서 6번째로 선보인 ‘렌트’의 무대는 박칼린 음악감독의 음색이 돋보이는 뮤지컬 넘버와 오랜 ‘렌트’의 연출가 김재성의 안정적인 지휘아래 변함없는 감동을 전했다. 기약 없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젊은 예술가들을 소재로 어두운 현실 속에 한줄기 꿈과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죽기 전에 명곡을 남기고 싶어 하는 로커 로저와 마약에 중독된 댄서 미미, 거리의 드러머이자 트랜스젠더인 엔젤과 에이즈에 걸린 컴퓨터 천재 콜린 등 개성 있는 캐릭터와 그들이 보여주는 희망과 사랑은 관객들에게 찡한 감동을 안겼다.
하지만 2009년 ‘렌트’에 캐스팅 된 신인배우들은 무대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고 앙상블에서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음역의 높낮이를 조절하지 못해 불안한 음색을 드러냈고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고통 속에 표현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유쾌한 ‘그리스’…배우들의 가창력 부족
1971년 시카고에서 초연된 뮤지컬 ‘그리스’가 무려 37년 동안 전 세계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뮤지컬로 자리 잡았다. 현재 영국과 미국-일본 등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그리스는 2003년 한국에서 초연된 이후 공연 횟수 1000회가 넘는 기록을 세우며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이다.
‘그리스’는 ‘You’re the one I want’와 ‘Summer Nights’ 등 귀에 익숙한 뮤지컬 넘버와 청춘남녀의 꿈과 사랑, 그리고 좌절과 희망을 담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나루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그리스’에서도 젊음의 유쾌함을 느낄 수 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인 만큼 무대나 음악은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1950년대 제임스 딘을 상징하는 젊은이들의 복고 스타일도 재미를 더했고 등장인물들의 개성 있는 캐릭터도 매력적이게 표현됐다.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뮤지컬 음악을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가창력이 문제다. 이번 한국공연의 주인공 대니 역으로 새롭게 캐스팅 된 SS501의 박정민은 가수출신답게 뮤지컬 넘버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핑크레이디 클럽’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개성 있는 음색으로 안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T-bird’ 클럽 남학생들은 공연 내내 불안정한 음역으로 주옥같은 ‘그리스’의 뮤지컬 넘버를 소화하지 못했다.
‘로미오 앤 줄리엣’…단순한 무대, 원작의 감동도 반감
셰익스피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프랑스 3대 뮤지컬로 꼽히는 ‘로미오 앤 줄리엣’은 애절한 사랑을 주제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오랜 관심의 대상이었다. ‘빅 쇼’가 계속되는 한국뮤지컬계에 세계적인 ‘로미오 앤 줄리엣’도 가세했다.
2007년에도 내한했던 오리지널 ‘로미오 앤 줄리엣’의 제작팀은 2009년 월드 투어의 첫 번째 국가로 한국을 선정했다. 프랑스 전 지역 450회 공연, 전 세계 16개국 공연을 선보인 ‘로미오 앤 줄리엣’은 2007년 공연과 달리 4곡의 신곡을 들고 찾아왔다.
하지만 무대는 너무 단조로웠다. 웅장하고 격렬하게 표현돼야 할 ‘로미오 앤 줄리엣’의 무대는 무대세트를 무용수들이 직접 움직여 이동해야할 만큼 한계가 있었다. 대극장 무대였지만 연출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돼 빠른 장면이동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명은 붉은색과 푸른색, 흰색으로 단순하게 구성됐다. 캐플렛가와 몬테규가의 대립과 증오를 상징하는 붉은색, 푸른색의 조명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만남을 이루는 가면무도회에서의 흰색조명이 전부였다.
단조로운 무대효과 때문인지 주연들의 드라마도 단조로웠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느낄 수 있는 열정적인 둘의 사랑과 격렬하게 대립해야 하는 두 집안의 드라마는 무대효과를 비롯해 주연들의 연기에서도 부각되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열정적인 안무를 선보인 무용수들과 오랜 사랑을 받아온 ‘로미오 앤 줄리엣’의 뮤지컬 넘버는 훌륭했다. 조연들의 음색과 연기도 빛났다. 줄리엣을 짝사랑하는 애절한 티볼트와 줄리엣의 유모의 연기는 단조로운 무대장치에서도 빛났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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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돈 주앙’ ‘그리스’ ‘렌트’ ‘로미오 앤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