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한국야구 발전뒤에는 지도자 피땀 밑마탕
OSEN 기자
발행 2009.03.12 07: 26

[OSEN=김대호 객원기자] 한국야구의 급성장에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 아시아의 맹주임을 자부해온 일본은 물론이고 야구 종주국 미국까지 한국야구를 재평가하고 있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에 이어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 그리고 이어진 제2회 WBC까지 한국야구의 기세는 거침없이 뻗어 나가고 있다. 한국야구가 이 처럼 세계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한 뒤에는 선수들 뿐 아니라 지도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프로야구가 국제화에 나선 것은 1991년 한-일 슈퍼게임 때부터였다. 당시 프로 올스타를 구성해 일본 원정에 나선 한국야구의 수준은 일본 2군 정도였다. 일본 1군 선수들과 맞붙은 한국 프로 올스타는 현격한 수준 차이를 절감하며 깊은 실의에 빠졌다. 일본 타자들의 현란한 타격기술과 투수들의 정교한 컨트롤에 한국 선수들은 넋을 놓을 정도였다. 수비와 베이스러닝에서도 일본의 야구기술은 한국에 멀찍이 앞서 있었다. 당시 한-일 슈퍼게임을 다녀온 대부분의 관계자는 “한국이 일본야구를 따라가려면 최소한 30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한국야구는 이로부터 불과 9년이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프로선발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을 두 차례 연속 꺾고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어떻게 한국야구가 이 처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으로 지도자들의 노력을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한국 프로야구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 팀마다 코칭스태프의 포화상태를 맞게 됐다. 프로 출범과 함께 뛰었던 선수들이 대거 은퇴하면서 지도자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코치로 들어가는 것조차 바늘구멍만큼이나 어렵게 됐다. 몇몇 뜻있는 은퇴선수와 오갈 곳 없는 인사들은 해외연수 길에 올랐다. 기존 코치들 역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코칭스태프 사이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붙었으며, 실력 없는 코치들은 여지없이 도태됐다. 각 팀 코치들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선수들 장단점을 분석하느라 동이 튼 다음에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비시즌은 물론 시즌 때도 가방 한 쪽엔 야구 이론 서적이 필수 지참물로 자리 잡았다. 코칭스태프의 경쟁에서 비롯된 학구열과 한국야구의 비약적인 발전은 그 궤적을 같이 한다.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한 코치들은 선수들에게 합리적인 지도를 하게 되었고, 이를 받아들인 선수들인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향상하게 된 것이다. 지난 해 일본에서는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끈 김성근 SK 감독과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사령탑 김경문 두산 감독을 배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탁월한 지도력이 바다 건너까지 넘어간 셈이다. 김인식 WBC 감독은 9일 일본전에서 이긴 뒤 한국야구의 미래는 밝다고 자신했다. 이는 김인식 감독을 비롯한 뛰어난 지도자들이 지금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넘치는 열정으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인식 감독을 비롯한 WBC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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