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요소는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이다. 모든 소설은 이 세 가지 요소를 활용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려 한다. 하지만 최근 비디오 세대들의 등장은 세 요소 중 인물과 사건에 집착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 사건 전개는 액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빨라졌고 ‘서사’적 기능이 갈수록 부각되는 현실이다.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모처럼 ‘서사’와 ‘묘사’가 균형을 이룬 소설이 출간 됐다. 1969년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해 세계일보 체육부장 및 논설위원, 문화일보 편집부국장을 역임한 민병택 씨가 ‘진혼일기’라는 묵직한 소설을 내놓았다.
‘진혼일기’는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사회 계급이 존재하던 막바지 시절의 이야기다. 농지개혁이 이뤄지기 전, 병약한 지주가 후손도 없이 죽음을 예약한 상황에서, 지주와 지주가 남길 재산을 바라보는 여러 인간군상들의 복잡한 심리를 다루고 있다. 지주가 소유한 막대한 재산을 놓고 펼치는 저마다의 분배의 법칙은 인간 내면의 맨 밑바닥을 건드리고 있다. 생존과 직결된 결정 앞에서 도덕과 윤리, 심지어는 양심까지도 인간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이 소설의 서사구조는 이처럼 단순하다. 하지만 지주의 건강과 지주의 재산을 둘러싸고 요동치는 객체들의 심리는 592쪽 소설에 망망하게 흐르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는데 지배적으로 쓰이는 기법은 묘사다. 숨쉬는 공기조차도 작가의 손끝에서는 묘사의 대상이 된다. 모처럼 서사와 묘사가 균형 잡힌 작품이지만 서사 중심의 근래 소설에 길들어진 독자들에게는 섬세한 묘사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진혼일기’를 펴낸 도서출판 뿌리깊은나무에서는 이 책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본격적인 심리소설’로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사건을 형성하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중심으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소개서에는 “등장인물들의 의식의 흐름과 내면에서 요동치는 사고의 방향감각을 추적하는데 주력해, 심리를 세분화하는 치밀한 묘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돼 있다.
문화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이종욱 시인은 ‘진혼일기’를 두고 “문체가 독특해 흡사 신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점묘법 같기도 하고, ‘의식의 흐름’을 교묘하게 비튼 듯하기도 하다”고 평하고 있다. 덕분에 “눈 앞에 펼쳐지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모여 이루어지는 전경이 어떤 모습인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첨언한다.
작가는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새벽 4시면 일어나 산책을 하고 글쓰기에 들어간다. 소설을 완성했을 때 주위 친지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하거나 문학지 기고를 권했다고 한다. 이때 작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괴테는 파우스트 1부를 56세에 완성했고 2부는 죽기 전인 82세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한다.
작가의 고집스러운 인생철학은 천주교 신부를 꿈꿨던 고등학교 시절, 폐병으로 사형선고를 받다시피 했다가 회복한 경험과 연관이 있다. 7년의 투병 끝에 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작가는 신부가 되어 아오스딩 같은 작가 겸 이론가가 되고자 했던 꿈을 30년이 지난 지금 이뤄가고 있다. 소설기법을 한 차원 높이고 새로운 패턴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작가로서의 꿈 말이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