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어교사에서 가정주부로, 그리고 시심과 노니는 시인까지. 초등학교 시절에도, 국문학도였던 대학시절에도 한 시도 시를 잊고 지낸 적이 없었다는 정연희 시인이 첫 시집 ‘호랑거미 역사책’을 내놓았다.
정연희의 시는 알맞게 정제된 생활 속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시심을 남다른 언어 감각에 실어낼 때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탄생한다는 진리를 ‘호랑거미 역사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성신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정연희 시인은 2007년 ‘현대시학’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첫 시집이 ‘호랑거미 역사책’이다.

뒷동산을 산책하다 보면 흔히 만나는 거미줄. 그 거미줄을 보고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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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거미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다.
그는 가늘고 질긴 실로 짠 둥그런 천을 올리브가지 사이에 내걸었는데
씨실과 날실의 간격이 일정한 흰 비단천이다.
호랑거미가 그 천위에 엎드려 사초(史草)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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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바라보고 적소에 시심을 대입하는 작법이 놀랍도록 기발하다. 그러면서도 시어들은 들뜨지 않고 차분하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작지만 소중한, 내 주변을 차분히 돌아보게 만든다. 소우주를 맞는 깨달음의 세계로의 초대다.
작가는 이런 배경에 대해 “그 동안 뒷산을 산책하며 생각하고 느끼고 본 것들을 형상화 해서 쓴 시들이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생태적인 것도 많지만 이들은 내 고향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 어린 시절, 산길을 어슬렁거리는 좋아했던 문학소녀는 녹지가 많은 상일동에 운명처럼 살게 된다. 상일동의 풍부한 녹지는 문학소녀의 꿈을 연장시키는 매개가 됐다.
정연희 시인은 “특별한 시론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내가 느끼고 본 것을 그냥 썼다”고 말한다. 시인의 주변에는 당연히 자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인이나 장애인이나 소외계층도 많이 생각하게 됐다.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고, 눈을 주고 귀를 세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주변에 대한 관심은 나 자신의 정화이기도 했다. “주변을 돌아보다 보면 어느 새 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시를 생각하고 읽고, 쓰는 것이 참 좋다”고 말한다.
작가는 ‘호랑거미 역사책’의 탈고 과정을 “나무의 우물을 찾아 물길을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버지 고모 삼촌들, 외롭고 소외된 그들과 소통하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세계를 두고 문학평론가인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은 정연희 시인의 영혼 안에 깃들여 있는 생래적인 '감각'과 '사유'의 균형이다. 그녀 시편들은, 일차적으로는 존재론적 현기(眩氣)를 수반하는 '감각'의 차원을 지향하지만, 어느새 그 안에는 다양한 미학적 전율을 환기하는 남다른 '사유' 과정이 배치되어 있다. 생을 깊은 허무에서 바라보기는 하지만, 그 깊은 심연에서 오히려 신비한 힘을 얻음으로써, 삶을 견뎌가는 내성(耐性)도 진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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