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스페인-스위스(H조), 더반]
경기가 시작하기 전 그 누구도 베스트 멤버가 총출동한 스페인이 스위스에 패배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회 최고의 이변으로 기록될 경기일 것이다.

이번 결과는 사실 스위스의 선전보다는 스페인의 부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는 2006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무실점을 기록한 팀이고 이번 스페인과 경기에 앞서 '9명 수비'를 공언했던 만큼 강력한 협력 수비 전술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이에 비해 스페인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스페인이 선수 개개인이 세계 톱클래스이고 조직력까지 갖춘 최고의 팀이라고 해도 바로 월드컵 우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이라는 대회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전술을 사전에 분석하고 이에 대비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전술을 준비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스페인은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은 월등히 뛰어났지만 하나의 팀으로서 골을 만들겠다는 정신력은 부족했다. 그들은 전반전에 몇 차례 괜찮은 슈팅 찬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완벽한 타이밍을 잡기 위해 드리블을 고집했다.
0-0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경기는 마치 2골 이상 리드하고 있는 팀이 여유있게 볼을 돌리고 있는 듯한 상황을 연상하게 했다. 세계 최고의 대회인 월드컵에서 이렇게 느슨한 정신력으로 경기에 임하는 팀은 보기 드문데 스페인의 플레이는 마치 자국의 2부리그 프로팀과 연습 경기를 하는 듯한 자만심 가득찬 모습이었다.
사실 전반전에 스페인의 패스 플레이는 놀라웠다. 스위스가 강한 압박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에 발을 대는 것도 쉽지 않았을 만큼 스페인은 안정적으로 볼을 돌리며 공격 찬스를 만들었다. 이는 짧은 패스와 긴 패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밀집해 있을 때는 반대 공간으로 볼을 전환하는데 스페인은 밀집된 그 좁은 사이에서도 짧은 패스를 통해 볼을 빼앗기지 않는 놀라운 기술을 선보였다. 이와 함께 반대편에 위치한 동료에게 넘겨주는 롱패스는 상대 수비가 스페인의 볼을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경이적이었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템포 조절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 패스를 돌리며 상대의 수비 진영을 흐트러뜨린 후 그 사이를 뚫는 절묘한 스루패스까지는 인상적이었지만 이를 바로 슈팅으로 연결하지 않고 드리블로 이어간다면 그 효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패스를 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스페인 선수들은 본인이 무언가 해결하려는 과유불급의 모습을 보였다. 월드컵이 리그가 아닌 단기전임을 고려하면 선취골을 넣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한 개인적인 플레이는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이날 패인은 스페인의 감독이 선수들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후반 교체된 나바스의 스피드 있는 플레이는 효과적이었지만 그의 크로스는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스페인의 공격수보다 스위스의 신장이 클 뿐 아니라 수비수 숫자 또한 상대 공격수보다 많았고 모두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크로스를 고집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스페인으로서는 차라리 패스를 돌리며 기회를 엿보다가 순간적으로 템포를 달리하는 스루패스를 활용하는 평소의 공격 패턴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수비진을 한 순간에 허물어버릴 수 있는 이니에스타를 빼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토레스와 페드로를 기용한 것은 감독의 큰 실수였다.
물론 스페인의 또 다른 패인으로는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경기를 지켜본 결과 자블라니는 공격수가 인스텝으로 정확히 맞췄을 때는 지나칠 정도의 가속력이 붙고 인프런트로 감아서 슈팅할 때는 휘어지지 않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스페인과 같이 섬세한 볼 컨트롤을 자랑하는 나라로서는 자블라니 같은 볼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큰 손해임은 분명하다.
비록 스페인은 불의의 일격을 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다. 이 경기에서도 선수들의 정신력과 전술이 문제였을 뿐 컨디션과 기량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여 16강 진출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역사적으로 볼 때 강력한 선수 구성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이 패배는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전 정신적인 재무장을 할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경기를 애타게 기다려왔던 전 세계의 팬을 실망시킨 만큼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스페인 특유의 환상적인 공격력으로 보상해주길 기대한다.
OSEN 해설위원(FC KHT 김희태축구센터 이사장, 전 대우 로얄스 및 아주대 명지대 감독)
<정리> 김가람 인턴기자
■필자 소개
김희태(57) 해설위원은 국가대표팀 코치와 대우 로얄스, 아주대, 명지대 감독을 거친 70년대 대표팀 풀백 출신으로 OSEN에서 월드컵 해설을 맡고 있습니다. 김 위원은 아주대 감독 시절 서울기공의 안정환을 스카우트했고 명지대 사령탑으로 있을 때는 타 대학에서 관심을 갖지 않던 박지성을 발굴해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로 키워낸 주역입니다. 일간스포츠에서 15년간 해설위원을 역임했고 1990년 이탈리아 대회부터 2006년 대회까지 모두 5차례의 월드컵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현재는 고향인 포천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축구센터를 직접 운영하며 초중고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