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성여중고 팝송대회 김이순‧김극숙 수상자
공부 못한 한 풀려고 40∼80대 주부 만학도들 모여
김이순 “등교 시작하니 불면증 싹~ 매일 아침 설레”

김금숙 “‘두고 생각하며 못온다’는 선배 조언에 입학”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사교육에 밀려 학교교육이 무너지고 있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스승에 대한 존경심도 사라진지 오래다. 학교가 나날이 그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못다 이룬 꿈을 펼치고자 늦은 나이를 굳이 감추지 않고 학교에 모인 이들이 있다. 일성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이들이 지난 21일 마포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팝송경연대회’를 열고 화려한 무대를 펼쳤다. 해마다 치러지는 학교의 의례적인 행사쯤으로 여겨두기엔 무언가 색다른 것이 있다. 늦깎이 만학도들이 난생 처음 영어를 노래하는 남다른 감회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24일 오후 5시경 일성여자중고를 찾아갔을 때 한창 수업 중이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이번 대회 중학교 부문 장려상 수상자인 김이순(63) 씨와 고등학교 부문 대상 수상자인 김금숙(43)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팝송경연대회에서 수상한 소회 이상의 것이었다.
▲‘A’도 모르던 내가 팝송을 부른다
‘아주 특별한 팝송경연대회.’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길거리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는 팝송이다. 여기저기서 열리는 노래자랑 무대도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이 팝송경연대회에는 ‘아주 특별’해야 하는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외국어를 배운 이들이 부르는 팝송은 영어라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도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일성여자중고등학교에서 개최한 이번 팝송경연대회 최연장자는 김이순 씨다. 올해로 예순 셋이 된 그는 대회의 수상보다 영어에 대한 어려움을 먼저 토로한다. “처음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어인데다 그나마 안 쓰던 단어들이 가득해 힘들었다”고 말문을 연다. 하지만 표정에선 그날 대회 풍경에 젖어 있는 즐거움이 묻어난다.
“노래하기가 어려웠다. 음도 맞추기 까다롭고 가사도 외우기 힘들었지만 특히 영어발음이 입에 붙지 않아 어려웠다. 그래도 무대에 오르는 일이 재미있었다.” 김이순 씨는 중학교 부문 중창팀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영어와 친숙해지라는 학교의 배려
예선을 통과한 15개 팀이 겨룬 이번 대회에서 고등학교 부문 대상을 받은 김금숙 씨는 “영광이다. 기분이 좋았다”고 수상소감을 전한다. 연습을 많이 못했다고 겸손해했지만 그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가수’였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오래 전부터 생활 속 유희로 만들어온 터다. “대회에 같이 참가하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과 화음 맞추기가 어려워 솔로로 출전했다”고 말하는 그는 준비단계에서부터 이미 수상을 확신하고 있었던 듯 보였다.
김금숙 씨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고등학생인 그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되어 겨우 서너 달 영어를 접해온 김이순 씨와는 사정이 달랐을 거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일성여중고의 팝송경연대회는 영어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라는 학교 측 배려다. 학교의 ‘영어생활화’ 교육은 이외에도 영어로 인사하기, 영어회화 암기하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한자공부가 가장 좋다
김이순 씨가 학교에 다시 다니기로 결심한 건 쉽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 태어나 결혼해 얻은 1남3녀 뒷바라지만 하다 보니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학교는 다니고 싶었지만 번번이 잃어버린 자신감이 발목을 잘았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불현 듯 내놓은 제안은 먼 길을 돌아온 그에게 현실이 됐다. 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올해 3월부터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그에게 생긴 가장 변화는 ‘불면증이 없어진 것’이다.
아침에 눈떠 학교에 갈 생각에 매일 설렌다는 김이순 씨는 학과 중 한자공부가 가장 좋다고 했다. “마치 눈이 열리는 기분”이라는 그는 “우리말의 대부분이 한자로 이뤄져 그 뜻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며 한자에 대한 ‘신비에 가까운’ 경험을 털어놓는다. 한 달에 한 번씩 치러야 하는 한자급수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버겁다지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경이로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배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중등과 고등 27개반으로 이뤄진 일성여중고 학생들 대부분은 김이순 씨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주부 만학도들이다. 못 먹고 못 배웠던 것이 그들만의 탓이 아니었을 텐데 그 무거운 짐은 온전히 그들에게 돌아왔다.
40대에서 80대까지 각자의 사정 때문에 떠안고 살아와야 했던 공부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학교에 모인 주부들에게 배움은 이제 더 이상 막연한 꿈이나 마음 한켠을 누르는 고통이 아니었다.
어릴 때 고등학교를 중퇴한 김금숙 씨는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1남2녀를 둔 주부다. 학교에서 그는 ‘어린’ 학생에 속한다. “고등학생인 아이와 교제도 같이 사용한다”는 그의 소녀시절 꿈은 소설가였다.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하고 있는 그의 확고한 미래계획에 ‘남들보다 늦은 나이’는 이제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못한다.
▲용기와 자신감이면 된다
“시험이 너무 많다”고 투정(?)을 부리는 김이순 씨에게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대학진학이란 새로운 목표가 다시 생겼다. 당장은 중학교를 졸업해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이제는 사회에도 이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일찍 공부를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며 안타까움을 실어낸다. “대학까지 가려면 일흔인데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지 못한 아쉬움은 후배 만학도들을 위한 조언으로 이어진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감만 있으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김금숙 씨는 입학 문의를 위해 처음 학교에 전화를 해봤던 그날 통화내용이 잊히지 않는다. 이 학교 출신의 선배라고 신분을 밝힌 상담원은 “두고 생각하면 결국 못 온다. 처음 마음대로 와라”고 권해주었다. 이 말은 지금껏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흐트러질 때마다 김금숙 씨를 다잡는 한마디가 돼주고 있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사진>김이순 씨(위)와 김금숙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