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즐겁고 발은 편한 산길
한반도 자궁에 위치해 ‘포근’
[이브닝신문/OSEN=김중기 기자] 인심 좋은 마을 이런 말은 옛날 얘기에만 있다고 여겼다. 과연 그럴까.

담배가게를 찾았지만 주왕산이 자리한 청송은 서울보다 넓은 면적에 인구는 웬만한 동보다 작은 2만7000명뿐이다. 작은 점방 하나를 겨우 발견했다. 담배를 사고 나오려는데 주인 할머니가 말을 건다. “시원한 커피 하나 마시고 가” 커피를 강매하는 줄 알았다. “얼마예요” “그냥 가져가” 웃는 낯에 들고 나오긴 했지만 의심이라는 직업병이 고개를 쳐든다. ‘유통기한이 지났나.’ 캔을 뒤집어 보니 내년 여름, 아직 1년이 남았다.
주왕산 입구인 대전사에서 국립공원 생태해설사가 검은 가방을 건넸다. “짚신으로 갈아 신으세요.” 첫 감촉은 시원하다. 몇 발자국 걸으니 까슬까슬한 바닥이 혈자리를 꾹꾹 눌러준다. 마님에게 사랑받는 마당쇠가 될 것만 같다.
짚신 신고 등산하기는 무리가 아닐까? 혹자는 남한 3대 바위산으로 설악산,?월출산, 주왕산을 꼽는다.?그러나 주왕산은 거칠지 않다. 대전사에서 제1폭포까지 완만한 오르막을 이룬다. 계단도 몇 개 없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약간의 도움만으로 오를 수 있을 정도다.
속 깊은 산, 들어가야 맛을 알죠
대전사의 중심 건물인 보광전 뒤로 4~5개의 우뚝 솟은 바위(기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푸른 숲 위로 생뚱맞게 서 있는 이 바위들만 보면 남한 3대 바위산이라는 별명이 무색하다. 비슷한 크기인 월출산만 해도 산 위로 바위들이 가득하다.
주왕산 바위의 진면목은 그 품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반도 지도를 호랑이 모양으로 놓고 보면 주왕산은 자궁에 해당한다. 깊은 속살을 감췄다. 주방천을 따라 제1폭포를 향하는 등산로는 어머니의 품인 내원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봉우리들은 내원동을 안고 강강술래 하듯 둥글게 늘어서 있다.
주왕산이란 이름은 주왕에서 따온 것이다. 주왕굴, 기암, 장군봉, 무장굴 등 이곳의 자연물 대부분이 주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주왕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통일신라시대 반란에 실패한 왕족 김헌창이 이곳으로 은거했다는 설과, 중국 진나라 주왕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신라로 도주해 최후를 맞이한 곳이라는 얘기가 있다. 향토사학자 김규봉은 자신의 저서인 ‘주왕산’에서 “진나라 주왕에 대한 이야기는 김헌창의 반란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전설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주왕산에는 아직 산성이 남아 있어, 그 역사를 짐작케 한다.
대화 스톱! 절경 놓칠라
숲길은 평지같이 편하다. 등산복장을 갖춘 ‘산꾼’ 보다 면바지에 반팔 티 하나 걸친 사람들이 더 많이 띤다. 한결같이 기자의 얼굴 한번, 짚신 한번 쳐다보며 지나간다. 부러운게야. 짚신의 쿠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숲길의 반전은 주왕굴로 가는 갈림길에서 시작된다. 어디서 솟았는지 헌걸찬 바위들이 하나 둘 눈앞에 펼쳐진다. 그 절정은 학소대부터 제1폭포까지 이어진다. 바위와 바위 사이로 난 길이 자궁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일행과의 모든 대화를 멈추자. 비경을 놓칠 수 있다. 어떤 감탄사도 꺼내지 말고 조용히 차오르는 기쁨을 맛보면 된다.
이 문을 통과해 몇 걸음만 더 가면, 제1폭포가 나온다. 폭포는 선녀들의 목욕탕처럼 생긴 선녀탕과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구룡소를 돌아 떨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기에는 상당히 작아 보이지만 그 앞으로 자그마한 모래밭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어머니 산이 바위를 조물조물 빚어 놓은 듯 따뜻한 손길마저 느껴진다. 등산로는 여기서 제2폭포와 3폭포를 거쳐 내원동으로 이어진다.
한 때 사람이 살았던 내원동
3년 전까지만 해도 내원동에는 사람이 살았다. 이 깊은 계곡의 너른 터는 주왕산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신비다. “사람이 살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장사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씻고 그렇게 버린 물이 주방천으로 흘러 들어갔죠.” 제1폭포에서 발길을 돌리면서 생태해설사가 3년 전 철거의 이유를 설명했다. 한때는 800명 정도가 살았고, 학교가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주왕산은 사람을 품어도, 사람은 산을 품기 어려운 것일까.
haahaha@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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