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이 재편되는 과정인 만큼 젊은 선수들이 잘해야 장기적으로도 좋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세월에 밀려 뒤쳐지고 싶지는 않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 뿐이다".
자신의 프로 18번째 시즌을 준비하며 덤덤하게 밝힌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다시 떠올라 선수생활의 끝을 준비하는 그의 현재가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쿠옹' 구대성(41. 한화 이글스)이 아마추어-프로 시절 도합 30여 년의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한화는 15일 보도자료를 통해 "베테랑 좌완 구대성이 올 시즌을 끝으로 선수 유니폼을 벗는다"라고 밝혔다. 1993년 대전고-한양대를 거쳐 전신 빙그레에 1차지명으로 입단한 구대성은 국내 무대에서의 13시즌 동안 통산 568경기 67승 71패 18홀드 214세이브 평균 자책점 2.85(15일 현재)의 호성적을 올렸다.
특히 구대성은 동기생 '삼손' 이상훈(전 LG-SK)에 이어 한국 무대와 일본 프로야구-메이저리그를 모두 경험한 유이한 투수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담긴 선수생활을 펼쳤다. 비록 해외무대에서 최고의 위치에 서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팀이 원하는 순간 제 몫을 하는 투수였음을 떠올려보면 구대성의 선수 생활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 '보직'을 가리지 않던 '왼손 고무팔'
대전 신흥초교 4학년 시절 형 구대진(전 쌍방울)을 따라 선수 생활을 시작한 구대성은 대전고 시절부터 초특급 좌완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부러 무사만루를 만든 뒤 "만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다"라며 후속 3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일축한 뒤 공수교대를 위해 무뚝뚝하게 덕아웃으로 향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한양대 시절 국가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좌완으로 활약하며 고려대 이상훈, 단국대 김홍집(전 현대-한화)과 함께 주축 좌완 3인방으로 명성을 떨쳤던 구대성. 데뷔 첫 해 6경기 출장에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던 구대성은 한화로 구단 명칭이 바뀐 후 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투수로 맹활약했다.
특히 1996년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 자책점 1.88로 다승-구원(40 세이브포인트)-평균 자책점 투수 3관왕좌에 오르며 골든글러브, 시즌 MVP 타이틀까지 석권한 것은 구대성의 팀 내 비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게 한 단면. 55경기(선발 2경기)에 등판해 139이닝을 소화하며 대단한 연투 부담이 있었음에도 구대성은 팀이 원하는 순간 언제나 마운드에 올라 제 공을 던지며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1996시즌 세부 기록을 살펴보면 더욱 대단하다. 그 해 구대성의 이닝 당 주자 출루 허용률(WHIP)은 0.76(자료 출처-www.statiz.co.kr)으로 평균 3이닝 당 주자 두 명 정도를 출루시킨 위력을 자랑했다. 피안타율도 1할6푼3리로 당시 8개 구단 투수들 중 단연 전체 1위. 투수 분업화가 보편화된 현 시점에서 돌아보면 구대성의 활약은 1983년 삼미 소속으로 故 장명부가 세운 30승 기록에 버금갈 정도로 상상하기 힘든 모습.
'일본 킬러'의 위력을 제대로 발산하며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이 된 2000시즌을 끝으로 한화에서 오릭스로 이적한 구대성. 오릭스는 팀 최고 타자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를 이적시키면서 받은 포스팅 금액을 구대성 영입에 투자했다.
▲ '최약체 팀'에서의 분투, 그리고 아쉬운 MLB 한 시즌
금융사 오릭스는 구대성 이적 당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에도 영향을 미쳤던 기업. 이치로를 메이저리그로 이적시키며 전력 공백이 생긴 오릭스는 '한국산 일본 킬러' 구대성을 영입해 전력 누수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2001시즌 일본 첫 시즌 구대성에게 처음 주어진 보직은 마무리 투수.
그러나 구대성의 일본 첫 시즌은 7승 9패 10세이브 평균 자책점 4.06으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 신인 오쿠보 마사노부가 새로이 뒷문을 책임지면서 오기 아키라(작고) 감독이 구대성에게 다른 보직을 부여한 것. 구대성은 그 해 올스타전에 출장했다는 데에 위안을 삼으며 두 번째 시즌을 선발로 맞았다.
2002시즌 구대성은 2.52의 평균 자책점으로 팀 동료 가네다 마사히코(2.50)에 이어 퍼시픽리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당시 팀 타율 2할3푼5리로 역대 최악의 팀 타선을 자랑(?)한 타선 지원의 극심한 빈약함으로 인해 5승(7패)을 거두는 데 그쳤다. 지난 2008년 히어로즈에 '좌완 3인방'은 있었으나 클리프 브룸바나 이택근(LG) 등이 없었던 가상 상황에서 활약했다고 보면 되겠다.
2003년 6승 8패 평균 자책점 4.99, 이듬해 6승 10패 평균 자책점 4.32로 분투했던 구대성은 2004시즌 후 오릭스-긴테쓰 합병팀에 남아달라는 오기 감독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고 메이저리그로의 도전을 선택했다. 뉴욕 양키스로의 입단 가능성도 있었으나 그는 연봉 45만 달러에 뉴욕 메츠와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 두 번째 메이저리거의 탄생이었다.

커다란 꿈을 현실화한 구대성이 메츠에서 남긴 성적은 33경기 승패 없이 평균 자책점 3.91에 WHIP은 1.52였다. 2005년 5월 22일 양키스전서는 당시 최고 좌완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때려내는 기염을 토했으나 후속 타자의 보내기 번트에 3루를 거쳐 단숨에 홈까지 뛰어드는 진기명기를 선보이는 과정에서 어깨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현지 팬들에게 '기인 투수'라는 이미지는 심어주었으나 그와 함께 구대성의 메이저리그 활약도 사실상 끝났다. 여기에 메츠와의 계약이 끝나는 과정에서도 매끄럽지 못한 에이전트의 일처리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원 소속팀 한화로 2006년 복귀했다.
▲ '대성불패'의 위력, 그러나 안타까운 세월
5년 외유를 마치고 다시 한화로 돌아온 구대성은 그해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공헌한 뒤 그 해 59경기 3승 4패 37세이브 1홀드 평균 자책점 1.82의 호성적으로 팀의 한국 시리즈 진출까지 이끌었다. 노련해진 '대성불패'의 위력을 대번에 알 수 있던 순간이다.
2007시즌을 앞두고 시범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구대성은 그 해 1승 6패 26세이브 평균 자책점 3.19를 기록하며 '회춘투'를 이어갔다. 이듬해 마무리 요원으로 입단한 브래드 토마스의 가세로 셋업맨 변신을 꾀한 구대성은 무릎 수술 여파에도 2008년 38경기에 등판해 2승 3패 9홀드 평균 자책점 3.48의 성적을 남겼다.
팀이 최하위로 추락한 2009시즌 불혹을 넘긴 구대성의 활약은 연민을 자아냈을 정도다. 시즌 초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시즌 후반기 들어 구위를 회복하며 무려 71경기에 등판해 1세이브 8홀드 평균 자책점 3.72를 기록했다. 예년처럼 이기는 상황에서의 등판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는 않았으나 후반기 구위 회복상은 선수단과 팬에 자그마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실제로도 한대화 감독은 올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리빌딩하는 과정에서 베테랑은 필수 요소다. 구대성이 나이가 있지만 구위에 문제가 없다면 마무리로도 나설 수 있을 것이다"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올 시즌 구대성은 6경기 1패 평균 자책점 10.38의 기록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기는 상황에서 언제나 마운드에 올라 '대성불패'의 위력을 떨치던 그였기에 팀의 전력 약화와 함께 선수생활의 끝을 선택한 구대성에 대한 팬들의 아쉬움은 결코 적지 않다. 실제로 아직까지 이글스 구단 역사 상 구대성만큼 경기를 매조지는 노릇을 확실하게 해냈던 투수가 없었기 때문. 송진우, 정민철은 선발로서의 모습으로 마운드를 이끌던 에이스였으며 현재의 류현진도 마찬가지다.
유유히 흐르는 장강(양쯔강)의 흐름을 막을 수 없듯이 흐르는 세월을 막기 힘든 것은 사실. 팀 역사 상 가장 효과적인 투구를 보여준 좌완 계투였던 동시에 한-미-일 3국에서 풍부한 경기 경험을 샇은 베테랑 구대성의 은퇴 선언은 한화에 또 하나의 커다란 숙제를 안겨준 것과 같다.
farinell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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