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이면 안된다".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김성근 SK 감독이 경기 속 계속돼 왔던 '사인 훔치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김 감독은 지난 14일 사직 롯데전 3회말 추평호 주심에게 항의했다. 롯데의 베이스코치들이 사인을 훔친다는 것이었다. 박계원 3루 작전코치가 공필성 1루 주루코치에게 전달, 상대 포수의 사인을 훔친 후 1루 코치가 다시 타자에게 알려준다는 것이었다.

김 감독은 이에 "사인 훔치기는 모든 팀이 다 한다. 다만 그것을 기술적으로 해야 상대가 알아채지 못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골적이면 안된다"면서 "미국의 경우는 더 심하다. 노골적이면 곧바로 빈볼이 날아간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사인 훔치기는 전 구단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비신사적이다는 인식을 떠나 철저하게 야구 속에서만 행하는 암묵적인 금기로 통했다. 잠깐 잠깐 이야기가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00년 두산과 현대가 맞붙은 한국시리즈 2차전. 당시 두산은 2루에 주자가 나가면 배터리 사인을 훔쳐보고 타자에게 구질과 코스를 알려준다는 내용이었다.
서로의 사인을 철저히 파고 들어 알아내지만 일단 노출되면 곧바로 사인을 바꿔 버린다. 그 전에 상대가 알아채면 바로 빈볼을 날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벤치 클리어링이 나오기도 한다. 철저히 그라운드에서만 행해지는 불문율이었다.
사인 훔치기는 지난 시즌 한국시리즈를 통해 일반 야구팬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됐다. KIA가 한국시리즈 1차전에 앞서 "SK가 사인을 훔친다"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SK만 사인 훔치기를 한다는 도덕적으로 좋지 않다는 뉘앙스를 앞세운 심리전이었다.
하지만 야구에서 사인 훔치기는 그동안 규정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비난의 대상도 아니었다. 3루 작전 코치가 공개적으로 사인을 낼 때 다른 팀 선수단이 일제히 집중하면서 뭔가를 찾아내려 했다. 단 상대는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한 방법으로 알아내야 한다. "사인 훔치기 때 나오는 동작은 사실 증거가 남지 않는다.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알아낼 수 없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모두 다 아는 내용이고 실제로 경기 중에 행해지는 것이다"는 한 야구관계자의 말처럼 사인 훔치기는 치밀하고 순간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해서는 안된다. 특히 2루 주자가 상대 포수 사인을 알아낸 후 보내는 사인은 보복조치를 당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로이스터 감독이 "사인을 훔쳤던 안훔쳤던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다른 팀도 마찬가지다. 이는 야구 규칙에 없다"면서 사인 훔치기가 가능하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데 대해 "무슨 소린가. 엄연히 대회 요강에 나와 있다. 왜 자꾸 미국 이야기를 하나. 여기는 한국"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말해 로이스터 감독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이 사인 훔치기라는 점에서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를 제재하기 위한 룰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대회운영요강 1장 26조에는 이와 관련해 '벤치내부, 베이스코치 및 주자가 타자에게 상대 투수의 구종 등의 전달 행위를 금지한다'고 돼있다. 또 이를 위반시에는 '해당 당사자는 즉시 경기장 밖으로 퇴장 당하며 필요시 제재를 과할 수 있다'고 규정돼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사례가 없었고 어떻게 이를 알아내 처벌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도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형식에 지나지 않는 규정이다.
어쨌든 지난 시즌 한국시리즈에 이어 지난 14일 SK-롯데전을 통해 '사인 훔치기'는 공론화됐다.
이제 소위 말해 봉인이 풀린 '사인 훔치기'가 남은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은 물론 내년 시즌부터 새로운 시각으로 야구팬들에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야구팬들은 2루주자를 비롯해 베이스코치들의 움직임까지 주시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흥미로 작용할지 궁금하다.
letmeout@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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