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법정스님 책 6종 출판 고세규 고즈윈 대표
유서작성 2∼3일 전에도 출간할 책 서문 받아
의구심 많았지만 출판사 이기로 비춰질까 동의

책 만들땐 현상황이 두세달 후 어떻게 될까 고민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그새 일곱 달이 지났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신 지 말이다. 지난 3월11일 스님은 많은 사람의 안타까움과 탄식을 뒤로 하고 입적하셨다. 스님의 입적 소식에 평소 스님이 세상에 전하고자 한 이야기를 다시 듣고 보려한 사람들이 스님의 저서에 몰려들었다. ‘무소유’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아름다운 마무리’ 등을 비롯해 오십여 종의 책들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섰다. 주문은 밀려드는데 이를 감당할 여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책 구하기는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 한 가운데 ‘문학의숲’이 있었다. 법정스님의 책 6종을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1∼6위에 올려놓으면서 출판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례를 만들었다. 하지만 ‘법정신드롬’은 서서히 사그러들었고 다시 일곱 달이 지났다. 지난 13일 동교동에 위치한 고즈윈 사무실에서 고세규(40) 대표를 만났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법정스님 책들
‘문학의숲’은 고즈윈의 출판 브랜드다. 고즈윈은 문학의숲 로고를 단 법정스님의 저서와 편저 6종을 냈다. 2008년 11월 첫 책이 나왔다. ‘아름다운 마무리’다. 그 후 ‘산에는 꽃이 피네’(2009) ‘일기일회’(2009) ‘인연 이야기’(2009)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2009) 그리고 마지막 책이 된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2010)이 차례로 세상의 빛을 봤다. 그러나 이 책들을 서점에서 볼 수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님이 입적하신 후 문학의숲을 비롯해 스님의 책들을 냈던 출판사들이 사회봉사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결정을 수용, 더 이상 책을 내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여러 차례 관계자들의 논의를 거쳐 “스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로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하며 ‘절판’이란 결론을 이끌어냈다.
“스님이 절판을 결정하셨을 리 없다”
비단 법정스님이 입적할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나오는 대로 히트를 쳤던 스님의 책을 가장 많이 출판한 문학의숲으로서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컸다”로 말문을 연 고세규 대표는 “절판 결정이 나왔을 때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내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세인이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달랐다. 베스트셀러를 놓치지 않으려 한 출판사 대표 입장의 그것이 아니었던 거다. 고 대표는 “스님이 절판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님의 원래 뜻을 훼손할까봐 우려됐다.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는 것이 스님의 의도를 지키는 거라 생각했다.” 한마디로 스님이 유언으로 절판을 언급하셨을 리 없다는 얘기다.
입적 닷새 전까지 보이신 열정
고 대표가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건 입적하시기 닷새 전이라고 했다. 바로 그 즈음 출간된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스님이 평소 아끼시던 서적들에 대한 서평을 엮은 책이다. “그날 책을 보신 스님이 하신 말씀을 또렷이 기억한다. ‘예쁘게 나와서 이 책에 나와 있는 출판사 사장들이 좋아하겠다’였다.” 고 대표는 곧 절판이 될 책을 앞에 두고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겠냐고 되물었다. 고 대표의 주장에 설득력을 얻는 일은 더 있다. 문학의숲에선 당시 ‘수심결’과 ‘불타 석가모니’란 스님의 책 두 권을 더 준비하고 있었다. 고 대표는 나중에 유서작성일로 알려진 날의 2∼3일 전에 스님을 찾아뵙고 그 두 권의 서문을 받아왔다며 보여줬다. 불러주시는 걸 간병인이 받아 적은 서문이다. “가시기 직전까지 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으셨던 분이 바로 2∼3일 뒤에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다.”
“좋은 인연만으로 끝내자”
공증인과 변호사까지 동원된 스님의 유언장은 컴퓨터 서체로 타이핑 돼 스님의 사인과 도장이 찍혀 세상에 공개됐다. 이 또한 스님의 평소 모습이 아니란 게 고 대표의 생각이다.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분이셨다. 절판할 것을 염두에 두고 새 책을 진행할 수 없었을 거고, 또 제자들을 마다하고 공증인과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만드셨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고 대표가 많은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절판 결정에 따른 것은 “비즈니스의 흐름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할 수도 있었단다. 하지만 당시 절판을 반대하는 것이 베스트셀러 출판사의 이기로 비춰질 공산이 더 컸다. ‘사막별 여행자’(2007)란 책의 서문을 부탁했을 때 흔쾌히 허락한 스님과의 인연은 그 후 고즈윈 출판목록에 중요한 흔적을 남기며 이렇게 정리되게 됐다. 주옥같은 스님의 책들은 이제 두 달 남짓 후 서점에서 모두 사라진다.
두세 달 후에 변할 현상을 고민하는 기획
풀빛에서 편집자로 시작해 김영사를 거쳐 2004년 지금의 고즈윈을 세우며 독립한 고 대표가 기본 콘셉트로 잡고 있는 것은 ‘그때 그때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만든다’는 거다. 고 대표 자신뿐만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들에게도 요구하는 사항이다. 인문, 경영·경제, 철학, 아동 분야 등 150여종이 그렇게 나왔다. “기획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지금 현상이 두세 달 뒤에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했다. 편집자 시절 탐닉한 사회과학 분야가 시대가 바뀌면서 경제·경영서의 필요성으로 바뀜에 따라 안철수 등이 쓴 ‘당신에게 좋은일이 나에게도 좋은일입니다’(2004), ‘정몽구의 도전’(2005) 등을 내게 됐다. 그러다가 척박한 일상에 내몰리는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뜻에서 ‘티베트의 즐거운 지혜’(2009) 등 명상록들도 냈다. 그러다가 풍요로운 현대문명 뒤에 선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사막별 여행자’(2007), ‘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2009)가 그 결과물이다.
오늘이 책 만들기에 가장 좋은 날
고 대표에게서 들어본 종이책 출판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갈수록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사서 보는 콘텐츠에 대해 불편함을 느낄 것”이란 게 그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전자책이 대안인 것도 아니다. “편집자가 편집을 통해서 감성과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 책인데, 그 본질이 빠진 전자책으로 독자들을 주도하기는 어려울 거다.” 그래서 고 대표는 지금 만들어지는 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책을 만든다. “책 만들기에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다. 내일은 좀 더 나빠질 것이기에 바로 지금 더 즐겁게 일해야 한다.” 그것이 법정스님으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특별한’ 아픔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법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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