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카 인디아! ③아름다운 폐허, 파테푸르 시크리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0.10.25 10: 32

아름답고 섬뜩했다. 척박한 황토빛 도시를 거느리며 연붉게 피어난 파테푸르 시크리는 마치 오랜 세월의 비밀을 간직한 농익은 여인처럼 삶의 흔적이 지나간 자리에 들꽃을 피운 아름다운 폐허였다.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에서 차로 50여분만 벗어나면 무너지고 부서진 성곽 사이로 곱게 피어난 붉은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가 모습을 드러낸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한때 무굴제국의 수도였다가 버려진 사연 깊은 도시로, 걷는 걸음마다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에 대한 애잔한 슬픔이 스며 나와 발목을 잡는다.
인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연 아크바르(Akbar) 황제.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는데, 바로 제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날 때까지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사람을 시켜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바로 오늘날의 파테푸르 시크리에 은거하고 있던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Shaikh Salim Chisti)’를 찾아냈다.

황제는 그를 직접 만나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부탁했고, 성자는 손가락 셋을 펴 보이며 아들 셋을 예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성자의 예언에 따라 자한기르(Jahangir)를 비롯한 3명의 아들을 얻게 되니, 황제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무모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바로 샤이크 살림 치스티가 있던 파테푸르 시크리에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크바르 황제는 10여년에 걸쳐 벌판 위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를 아그라에서 이곳으로 옮겼지만, 불과 14년 만에 다시 아그라로 돌아가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물 부족이었다. 황제는 인공호수를 만드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역시나 허사였다.
결국 파테푸르 시크리는 짧은 영화(榮華)만 간직한 채 아그라에 수도의 자리를 내어주고 버려졌다. 그리고 400년간 철저하게 잊혀졌다.
이러한 사연 때문인지 파테푸르 시크리를 첫 대면하는 순간 ‘고독한 아름다움’이 마음 깊이 느껴졌다. 본래의 모습은 간데 없는 성곽에 둘러싸여 창공을 향해 보란 듯이 붉은빛을 펼쳐 보인 그 모습에 외로움이 솟구치고, 시간이 멈춘 듯 옛 것들이 남아있는 묘한 공간은 낯설기만 했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국왕이 생활하며 정무를 보던 왕궁과 아들을 점지해준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무덤이 있는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 사원으로 나뉜다.
왕궁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판치 마할(Panch Mahal)이다. 황제의 후궁과 시녀들만 머물렀다는 판치 마할은 벽 없이 176개의 기둥만으로 이뤄져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 앞으로는 황제가 시녀들을 말 삼아 장기를 즐겼다는 파치시 정원(Pachisi Courtyard)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파테푸르 시크리 최고의 장소는 자미 마스지드 사원 한가운데 자리한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무덤이다.
왕궁을 빠져 나와 높이가 무려 54m에 이르는 승리의 문(Buland Darwaza)을 통과하면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넓은 광장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자미 마스지드의 정문이기도 한 이 문은 아크바르 황제의 전투 승리를 기념해 세워진 것으로, 섬세한 문양과 웅장한 자태가 어우러지며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사원 한가운데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성자의 무덤에는 아들을 바라는 수많은 여인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한손에는 꽃을, 다른 한손에는 붉은 실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와 꽃은 성자에게 바치고, 실은 절박한 마음을 담아 창틀에 묶어둔다. 촘촘히 묶인 수만 가닥의 실은 서로 먼저 성자의 눈에 들려는 듯 바람을 타고 파르르 몸을 떤다.
글·사진 인도 파테푸르 시크리=여행미디어 박은경 기자 www.tourmedia.co.kr
취재협조=인도정부관광청 02-2265-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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