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군 생활이 막내렸다.
'국민타자' 이승엽(34)이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떠난다. 올 시즌을 끝으로 4년 계약이 만료된 이승엽은 자유의 몸이 됐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6일 보도를 통해 '요미우리가 이승엽을 비롯해 마크 크룬, 에드가 곤잘레스 등 외국인선수 3명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알렸다'고 전했다. 2005년 1월19일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제70대 4번타자로 화려하게 출발한 이승엽의 거인군 생활은 진한 아쉬움을 남기며 결말을 맺었다. 요미우리에서 보낸 5년간 통산 458경기 1533타수 421안타 타율 2할7푼5리 100홈런 256타점.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거쳐온 5년의 세월을 되돌아본다.
▲ 화려한 시작

지난 2005년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홈런 30방을 터뜨리며 부활에 성공한 이승엽은 그해 겨울 전격적으로 요미우리 이적을 결정했다. 지바 롯데에서 2억엔의 연봉을 제시했지만 이승엽은 이를 거절하고 연봉 1억6000만엔을 제시한 요미우리와 1년 계약을 맺는 모험수를 던졌다. 이승엽의 도전정신은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폭발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등에 엎은 이승엽은 도쿄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데뷔전부터 홈런을 터뜨리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해 이승엽은 도쿄돔에서 끝내기 홈런만 두 차례나 작렬시키며 클러치 히터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승엽은 요미우리 이적 첫 해부터 143경기에서 타율 3할2푼3리 41홈런 109타점 101득점으로 대폭발했다. 타격과 홈런 모두 2위였다. 특히 41홈런은 장훈이 1970년 기록한 34홈런을 36년 만에 넘어선 일본프로야구 한국인 한 시즌 최다홈런. 그해 요미우리는 5위로 추락했지만 이승엽의 입지는 크게 달라졌다. 시즌 종료 뒤 이승엽은 4년간 총액 30억엔이라는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연봉 6억5000만엔은 2003~2004년 연봉 7억2000만엔을 받은 로베르토 페타지니 다음 가는 역대 두 번째 고액연봉이었다. 게다가 계약조건에는 우승하면 메이저리그로 간다는 특별조항까지 포함돼 있었다.

▲ 부상의 수렁
이승엽은 2006년 막판부터 부상에 시달렸다. 그해 단 3경기만 결장할 정도로 4번타자로서의 책임감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왼 무릎 수술을 받은 이승엽은 그러나 2007년 한 해 내내 부상과 싸워야 했다. 특히 타격시 힘을 전달하는 왼손 엄지손가락 통증으로 고생했다. 시즌 종료 후 이승엽은 "3월부터 통증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고액연봉으로 장기계약을 맺은 첫해부터 부상을 이유로 쉴 수 없었다. 이승엽의 책임감은 성적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부상 중에도 137경기에 나와 타율 2할7푼4리 30홈런 74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시즌 마지막 3경기에서 4번타자로 결정타를 터뜨리며 5년 만에 요미우리를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남다른 승부사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엄지손가락 통증으로 2군에 다녀온 이승엽은 복귀 후 보호대를 착용하며 통증을 최소화하는데 애썼다. 하지만 고무 재질의 보호대 탓에 타격하는데 지장받자 보호대를 벗어던지는 투혼을 발휘했다. 결국 시즌 후 이승엽은 엄지손가락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황에서도 2008년 3월 열린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대표팀에 합류했다. 대표팀에서 맹타를 휘둘렀지만 정작 시즌에 들어간 후 침묵을 지켰다. 45경기는 데뷔 후 가장 적은 출장수였으며 타율 2할4푼8리 8홈런 27타점 모두 개인 최저였다. 102일간 2군 생활을 하는 등 데뷔 후 가장 오랜 시간 2군에 머물러야 했다. 뒷날 이승엽은 "3월에 경기를 한 것이 실패였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후배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승엽은 올림픽 본선에서도 결정적 홈런 2방으로 병역브로커의 면모를 과시했다. 힘든 여건에서도 나라를 위한 마음만큼은 과연 이승엽이었다.
▲ 좁아진 입지

2009년 이승엽은 배수의 진을 쳤다. WBC 참가를 고사하며 소속팀 요미우리에 전념했다. 시범경기에서 홈런 8방을 쏘아올리며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개막전에서 5번타자로 신뢰받았다. 시즌 초반 부진했지만 5월에만 타율 3할4리 7홈런 16타점으로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부진에 빠졌다. 10경기 35타석 무안타에 이어 7경기 24타석 무안타가 이어질 정도로 기복이 심했고 허리 부상 탓에 2군도 들락날락했다. 결국 2009년 77경기에서 타율 2할2푼9리 16홈런 36타점. 역대 최저 타율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4번타자 자리를 내놓고 대타로 나오는 경우가 잦았다. 허리 부상으로 진통제를 먹고 경기 출장을 강행하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올해 계약 마지막 해를 맞이한 이승엽은 '엔조이 베이스볼'이라는 문구를 가슴에 아로새겼다. 욕심을 비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야구를 즐기겠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개막전에 결장했다. 이후 줄곧 대타로만 기용됐다. 주전으로 나오다가도 좌투수가 나오면 벤치를 지켰고 희생번트 지시도 이어졌다. 이승엽을 진득하게 믿었던 하라 감독도 올해만큼은 냉정했다. 74일간 2군에 머무르다 1군에 올라왔으나 단 3일 만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올해 이승엽은 56경기에서 타율 1할6푼3리 5홈런 11타점에 그쳤다. 모든 기록이 개인최저였다. 그에게 주어진 타석은 고작 108타석. 주전으로 나오면 한 달 동안은 나올 타석이 올해 이승엽에게 주어진 기회의 전부였다.
지난해 OSEN과의 인터뷰에서 이승엽은 "요미우리로 이적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2005년 내게 손을 내민 팀이 요미우리"라고 말한 바 있다.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새로운 출발선상에 놓인 이승엽이다. 그는 "일본 내 타구단에서 뛰고 싶다. 다시 한 번 나의 존재를 어필하고 싶다"고 말했다. 5년의 요미우리 생활을 청산한 이승엽이 밑바닥에서 다시 도전의 길에 들어선다.
waw@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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