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번호는 바뀌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가족에게 다시 돌아와 힘이 나는 느낌이랄까".
일본서 2년을 보냈지만 입담도 여전했고 푸근했던 분위기도 똑같았다. 야쿠르트서 2시즌을 보낸 뒤 친정팀 두산 베어스로 돌아온 좌완 이혜천(31)이 2011시즌을 앞두고 팀원으로서 갖춰야할 자세와 각오를 이야기하며 밝게 웃었다.

1998년 전신 OB에 2차 2순위로 입단한 뒤 베어스 투수진에 없어서는 안 될 좌완으로 활약하며 11시즌 통산 559경기 53승 40패 6세이브 56홀드 평균 자책점 4.16을 기록한 이혜천은 2008시즌 후 일본 센트럴리그 팀 야쿠르트로 이적했다.
2008년 10월 29일 잠실구장서 열린 SK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서 선발로 5⅔이닝 4피안타(사사구 1개, 탈삼진 7개) 2실점 호투를 펼치며 뛰어난 구위를 보여준 것이 마침 야쿠르트 스카우트 시선에 들어왔다. 이것이 이혜천의 일본행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일본서 보낸 2년은 이혜천에게 시련으로 다가왔다. 선발로 기대하고 이적했으나 "좋을 때는 에이스 구위지만 나쁠 때는 정말 안 좋다"라는 다카다 시게루 전 감독의 평가가 말해주듯 이혜천은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첫 해 좌완 계투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으나 올 시즌은 19경기 등판에 그쳤다. 일본 2년 통산 성적은 61경기 1승 2패 1세이브 17홀드 평균 자책점 4.12.
올 시즌 후 코칭스태프 측에서 "이혜천이 필요하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구단 측에서 재계약을 거부, 다시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이 되었던 이혜천은 계약금 6억원 연봉 3억 5000만원 옵션 1억 5000만원에 두산과 복귀 도장을 찍었다. 2년 전 일본으로 떠날 당시 "반드시 두산으로 복귀하겠다"라는 약속을 스스로 지킨 셈.
지난 28일 응암동 소년의 집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이혜천은 잠실구장에서 "아침부터 높은 분들 모시느라 바빴다"라며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과 입담을 선보였다. 경기도 용인 수지에 거처를 새로 마련한 이혜천의 이웃은 임재철, 김선우, 손시헌 등 동료들이다.
▲ 감독 지시 따라 선발-계투 가리지 않을 것
"돌아와서 2년 동안 못 웃었던 것을 몰아서 웃고 있어요. 여기는 말도 통하고 편하니까. 한글을 다시 떼는 느낌이지".(웃음)
한결 편한 웃음으로 복귀 소감을 밝힌 이혜천은 친정팀으로 돌아온 데 대한 소감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외야수 민병헌의 경찰청 입대로 야쿠르트 시절 달던 등번호 49번을 받은 그는 "등번호는 바뀌었지만 다시 두산 유니폼을 입으니 포근하다는 느낌이 들더라"라며 말을 이어갔다.
"유니폼 재질이 많이 좋아졌던데요.(웃음) 정말 돌아와서 한 달 반 동안은 그냥 쉬었어요. 그리고 마음을 다시 정리하는 데 집중했고. 계약 협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운동하며 몸을 만들었지요".
김경문 감독은 재임 이래 좌완 선발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했던 지도자다. 지난해 히어로즈서 이현승이 이적한 데다 이혜천이 다시 돌아오면서 두산은 현재 이변이 없는 한 최소 두 명의 좌완 선발을 로테이션에 가세시킬 예정이다. 이혜천에게 선발진 합류와 관련한 질문이 던져졌다.
"따로 보직에 관련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없지만 일단 선발 투수로 뛰고 싶습니다. 그러나 시즌 운용에 있어 계투로 이동할 각오도 갖췄어요. 계투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갈 준비도 다 되어있고. 전 20년 넘게 야구하면서 언제나 그렇게 했으니까요".
내년 1월 12일 두산은 일본 미야자키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보직에 따라 몸을 만드는 과정이 다른 만큼 3년 만에 다시 치르는 친정팀 전지훈련서 어떤 준비 과정을 치를 것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시즌 중 제가 어느 보직을 소화할 지는 알 수 없으니 하루하루 잘 맞춰서 훈련을 치를 예정입니다. 어떤 날은 한계 투구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200개의 공을 던지는 날도 있을 테고 어떤 날은 정말 전력으로 10개의 공을 던지는 날도 있을 겁니다. 선발로도 계투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되니까요".

▲ "좌절하지 말자"는 각오, 선수단에 불어넣겠다
두산은 지난 2001년 한국시리즈서 우승한 이후 단 한 번도 패권을 차지한 적이 없다. 특히 김 감독이 부임한 2004년 이후로는 준우승 3회에 그쳤다. 선수층이 두꺼워지며 대권에 도전할 만한 팀으로 꼽히고 있으나 결국 문턱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이 가운데 이혜천은 팀 내서 주포 김동주와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유이한 선수. 그해 이혜천은 선발-계투를 가리지 않고 141⅔이닝을 소화하며 53경기 9승 6패 3세이브 6홀드 평균 자책점 3.62로 우승에 공헌했다. 9승은 자신의 커리어하이 승수이자 그 해 두산의 투수 개인 최다승이었다.
"프로 무대서 13년을 뛰면서 느낀 게 있어요. 밖에서 보는 객관적 팀 전력 만으로 우승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그 때 우리 전력이 상대적으로 다른 상위팀에 비해 약하기는 했지만 뚝심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선수들 간의 화합이 잘 되었어요. 우승 전력을 어떻게 갖췄는지 여부보다 선수들 사이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잘 화합할 수 있도록 이끌면서 팀을 최고의 자리에 놓을 수 있도록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포털사이트 다시보기로 두산 경기를 꼼꼼히 지켜봤다"라고 밝힌 이혜천에게 '선수들에게 전해줄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혜천은 "프로 선수들인 만큼 기술적으로 가르쳐 줄 것은 없다. 다만"이라며 답변을 이어갔다.
"경기를 보면서 느낀 것 중 가장 아쉬웠던 게 결과가 안 좋을 때 마운드에서 고개를 푹 숙이는 선수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저는 일본에서 잘 하지 못했어도 마운드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다음 시즌에는 우리 투수들이 풀 죽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우승이 간절한 팀에 다시 돌아온 만큼 이혜천의 각오는 남달랐다. "팔이 부러져라 던지겠다. 일본에서도 스리쿼터로 던지니 '부상 당하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다친 데는 없었다"라며 웃은 이혜천은 "어디가 부러지지 않는 한 경기에 나서겠다. 영웅심리 발동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선수들이 모두 하나가 되었으면 한다"라는 말로 눈빛을 반짝였다.
"제가 가진 우승 경험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죽어라 해보는 것이 목표지요. 그동안 계속 V4, V4라고 외쳐왔는데 이제는 저도 선봉에 서서 선수들의 뇌리에 'V4의 당위성'을 새겨넣고 싶어요. 지금 우리는 포스트시즌 진출을 목표로 하는 팀이 아니잖아요. 우승을 목표로 미친듯이 뛰는 겁니다".
farinell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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