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논란이 됐던 감독교체 사례는?
OSEN 이상학 기자
발행 2010.12.31 10: 25

삼성 선동렬 전 감독의 갑작스런 사퇴가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지난해 시즌 중 이례적으로 5년짜리 장기계약을 맺으며 구단으로부터 재신임받았던 선 전 감독은 계약기간 4년을 남겨두고 물러났다. 내년이면 30년째가 되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12월에 감독이 교체된 건 2차례 있었다. 그러나 발표상으로 그러했을 뿐 실질적으로 12월 중 전격 감독교체가 이뤄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역대 프로야구에서는 이처럼 논란이 됐던 감독교체 사례가 많았다.
▲ 1983년 MBC 김동엽 감독
1983년 MBC는 선수를 겸했던 백인천 감독이 팀을 떠나면서 전기리그에서 3위에 그쳤다. 후기리그를 앞두고 새로 앉힌 사령탑이 바로 '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후기리그에서 34승20패1무 승률6할3푼으로 MBC를 우승으로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어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그러나 MBC는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1무4패로 무너졌다. 당초 MBC가 해태에 객관적인 전력상 우위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후기리그 우승으로 예고된 보너스 지급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선수단의 사기가 저하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감독이 선수단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으며 반년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김 감독은 이후 1985년 다시 MBC 감독으로 복귀했다.

▲ 1990년 태평양 김성근 감독
1989년 태평양 사령탑으로 취임한 김성근 감독은 인천 야구 부흥을 이끌었다. 강훈련으로 선수들을 몰아붙인 김 감독은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라는 신인 투수 3인방을 길러내며 인천 연고팀을 사상 첫 가을잔치에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1990년 태평양은 5위로 떨어졌고 김 감독은 계약기간 1년을 남겨놓고 사퇴했다. 다름 아닌 '임호균 각서파동' 때문이었다. 시즌 전 구단이 임호균을 방출하려고 하는 것을 만류한 김 감독은 '임호균이 선발 5승을 거두지 못하면 옷을 벗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해 김 감독은 임호균은 한 번도 선발등판시키지 않았다. 김 감독은 각서대로 태평양 사령탑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각서 한 장이 이유였지만 그것보다는 태평양 프런트와 깊은 갈등이 진짜 이유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프런트와 싸워서 이길 감독이 없다는 것이 새삼 증명된 사례였었다. 
 
▲ 2002년 LG 김성근 감독
2001년 5월 감독대행으로 LG 지휘봉을 잡은 김성근 감독은 9승25패1무 승률 2할대(0.265)였던 팀을 맡은 뒤 49승42패7무를 거두며 5할대(0.538) 승률팀으로 변모시켰다. 이듬해 정식감독으로 취임한 김 감독은 페넌트레이스에서 4위를 차지한 뒤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LG는 한국시리즈에서 삼성과 명승부를 펼치며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운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김 감독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김 감독의 이기는 야구가 LG가 추구하는 신바람 야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이후 LG 성적은 신바람은커녕 칼바람만 불었다. 김 감독이 떠난 후 LG 사령탑은 5명이나 새로 앉았고, 한 번도 가을잔치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에 '염소의 저주'가 있다면 한국프로야구 LG에는 '김성근의 저주'가 있다.
▲ 2005년 롯데 양상문 감독
롯데에게 2000년대 초반은 암흑기로 기억돼 있다. '8888577'이라는 비밀번호가 증명한다. 그 중에 눈에 띄는 '5'라는 숫자. 양상문 감독 시절이 이뤄낸 작은 성공이었다. 양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2004년에도 롯데는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년간 2할대(0.282)로 압도적인 꼴찌였던 팀을 4할대(0.410) 승률로 끌어올렸다. 이어 2005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강력한 돌풍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한여름 고비를 넘기지 못하며 아쉽게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다. 58승67패1무로 4위 한화와 6경기차로 5위. 하지만 팀의 희망찬 미래를 확인했고, 양 감독은 젊은 감독의 기수로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시즌 종료 후 양 감독은 재계약에 실패했다. 롯데는 2차례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베테랑 강병철 감독을 재영입했다. 강 감독과 함께 한 2년간 롯데는 7위만 했다.
 
▲ 2008년 김시진 감독
사실 감독교체라는 말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2008년 히어로즈는 새로 창단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체된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을 승계한 히어로즈는 그러나 감독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7년 현대의 마지막 사령탑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선수단을 다독이며 잘이끌어왔던 김시진 감독이었지만, 히어로즈의 출발에는 함께 하지 못했다. 당시 히어로즈는 새로 출범하는 구단답게 노련한 베테랑 감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광환 감독을 초대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김 감독은 수석코치 직을 거절하고 팀을 떠났다. 그러나 히어로즈는 창단 첫 해부터 7위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그 해 시즌이 종료되기 전부터 이 감독을 경질하겠다는 소식이 외부에 알려졌다. 히어로즈는 시즌을 마치기가 무섭게 김 감독을 2대 사령탑으로 재영입했다. 불과 7개월만의 일이었다.
▲ 2010년 롯데 로이스터 감독
 
롯데 역사상 가장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감독이라면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사상 첫 외국인 사령탑으로 롯데의 부름을 받은 로이스터 감독은 구도 부산의 구원자가 됐다. 롯데의 지긋지긋한 '8888577' 꼬리를 끊어냈다. 부임 첫 해 롯데를 8년 만에 가을잔치로 이끌었다. 2009~2010년에도 롯데는 가을잔치에 나갔다. 롯데 사상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로이스터 감독 체제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위업이었다. 그러나 롯데는 매번 준플레이오프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3년 연속 반복된 준플레이오프 탈락에 롯데는 재계약 불가라는 칼을 빼들었다. 로이스터 감독으로 우승은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화끈하고 공격적인 야구로 부산팬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로이스터 감독을 향한 팬들의 재계약 구애 플랜카드과 현수막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waw@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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